
오늘 아침은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하는 첫번째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주제로 한 짧은 교리 시리즈입니다. “하나님은 계신가? 누구신가? 어떤 분이신가?" 보통은 권 단위로 성경을 공부하지만, 이번에는 잠시 신학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성경을 가까이 두시면 곧 관련 구절들을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윌 듀란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사회주의냐 개인주의냐가 아니다. 유럽이냐 미국이냐도 아니고, 동양이냐 서양이냐도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하나님의 존재 여부입니다. 성경은 매우 분명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성경 시편 90편 2절은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교리적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유일하신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임을 말해줍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말해줍니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하나님에 대한 매우 중요한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흥미롭게도 이 시편 90편을 쓴 모세는 인간의 연약함과 대비되는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했습니다. 예를 들면 시편 90편 10절입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마치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우리가 날아가 버린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인간의 연약함과 죄성을 보여주면서 이와 대조를 이루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우리를 안전하게 하시는 영원하신 존재이죠. 1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주는 대대로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우리는 늘 주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습니다. 우리는 늘 부족함과 연약함을 마주하면서 오직 주님의 힘만이 진정한 힘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하신 한 분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우리의 힘이 되시는 분으로 바라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이 주제를 살펴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문제가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신은 기독교인들이 만들어낸 존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실제로 세상의 모든 종교인들이 그저 종교를 임의로 만들어냈거나, 아니면 그렇게 했던 조상들에게 세뇌당했을 뿐이지 사실 초자연적인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개요에 있는 첫번째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계신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정말 하나님이 계신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제가 자주 언급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주장입니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책 <환상의 미래(The Future of an Illusion)>에서, 아시다시피 프로이트는 현대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비엔나의 정신과 의사입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안전에 대한 절실한 욕구가 있고, 깊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상황을 거의 통제할 수 없는 위협적인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필요할 때 도움을 받으려고 신을 만들어냈다.” 프로이트는 <환상의 미래>에서 인간이 세 가지 이유로 신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합니다. 첫번째 이유는 자연의 예측 불가능성과 비인격성, 그리고 무자비함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서 인간은 질병과 기근, 재난을 보면서 이런 것들에 맞설 방어책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이는 마치 남태평양의 화산섬에 사는 한 남성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그 남성은 탈출할 수 없는 섬에 고립되어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진흙집에 앉아서 진흙집에서 평범한 하루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바닥을 쓸지는 않았겠지만, 아무튼 그때 땅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진동을 느꼈습니다. 남성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화산섬이니까 가끔 있는 일이죠. 작은 오두막을 보강하고, 아이들이 안전한지 확인하고 모든 게 괜찮은지 살피면서 아내를 달랩니다. 그러다 진동이 심해집니다. 밖으로 나가 위를 보니 화산 꼭대기에서 용암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오두막을 정리하는 것이나 아이들을 달래는 것이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용암이 산비탈을 따라 흘러내리기 시작하면 빠져나갈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초자연적이고 초인간적인 하늘의 도움을 바라는 것뿐입니다. 프로이트는 이런 이유로 인간이 신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합니다.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인간이 신을 만들어낸 두번째 이유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인간은 늘 다른 사람들에게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끼기 때문에, 결국에는 경기를 중단시키고 모든 사람에게 마땅한 대가를 줄 수 있는 신성한 심판, 즉 초월적인 호루라기를 가진 우주의 신을 원하게 된다는 겁니다. 도중에 공평한 대우를 받지 못했더라도 최종적으로는 모든 것을 바로잡아줄 누군가를 바라게 된답니다. 프로이트는 또한 인간이 죽음과 소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신을 만들어 냈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견딜 수 없기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 어딘가에 있는 행복한 존재를 찾아 자신을 행복한 곳으로 데려가기를 바라는 것이랍니다. 그래서 천국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는 겁니다.
이것이 프로이트의 신관입니다. 프로이트가 생각하는 신은 인간의 상상 속에만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없습니다. 프로이트가 만들어낸 다른 모든 이론들처럼 자신의 타락한 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할 만한 어떤 증거도 없으며, 완전히 방어할 수 없는 주장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믿고 있습니다. 종교에 대한 매우 단순하고 무지한 시각을 보여주죠. 실제로 다른 종교를 살펴보면, 인간이 신을 만들어낼 때 구원하는 신을 만들어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개는 끊임없이 달래야 하는 억압적인 신인 경우가 많습니다. 알고 계시나요? 저는 프로이트의 의견과 정반대의 견해를 제시하고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인간이 신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은 신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신을 제거하고 싶어합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은 철학적으로든 현실적으로든 신 없이 살아가려고 합니다. 신을 제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합니다. 심지어 신은 죽었다고 주장하는 신학까지 만들어냅니다. 심지어 철학적으로는 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실제로는 신이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에덴동산으로 돌아가 보면, 하나님과 동행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 외에 일어난 첫 번째 사건은 바로 죄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죠?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습니다. 타락한 직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인가요? 아담과 하와는 누구로부터 숨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죄를 짓고 나서부터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이런 모습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계속되어 왔습니다. 실제로 로마서 1장을 보면, 하나님이 분명히 계시고 인간도 마음 속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고 합니다. 20절이죠. 21절에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았다”고 합니다. 2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읽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인간은 하나님을 만들어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프로이트의 주장이 완전히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인간이 신들을 만들어낸 경우, 즉 거짓 종교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신을 보면, 전능한 보호자가 아닌 두려워할 존재일 뿐입니다. 인도의 한 여인이 자신의 아기를 갠지스강에 던져 익사시키면서 자신이 믿는 그 신을 위대한 구원자나 우주의 재판장, 또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할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달래야만 하는 두려운 존재로 여깁니다. 만약 인간이 정말 신을 만들어내고 있다면, 분명 잘못된 종류의 신을 만들어내고 있는 겁니다. 사실 거짓 종교들이 그런 종류의 신들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악한 영들이 실제로 존재하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뜻대로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는 매우 분명합니다. 모든 증거를 무시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단정짓고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들어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놀라운 진실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그 중 하나를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너무 길게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신학자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많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완벽하게 증명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을 이유보다 믿을 이유가 더 많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잘 들어보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단 하나의 큰 기적, 즉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입니다. 실존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이 하나의 큰 기적으로 인해 모든 것이 이해됩니다. 반면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나서 다른 모든 것을 설명하기 위해 각각의 기적이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는 데 너무 많은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증거는 충분합니다.
예를 들어 신학자들은 ‘목적론적 논증’을 제시합니다. ‘목적론적’에 해당하는 영어 ‘teleological’은 완벽, 결과, 끝, 완성을 뜻하는 헬라어 ‘텔레이오스(teleios)’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는 완벽하게 만들어졌거나 완성된 물건을 보면 설계된 것이고 설계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계를 분해해서 모든 부품을 주머니에 넣고 아무리 오래 다리를 흔든다 한들 시계가 저절로 조립이 되어서 째깍거리는 소리가 날까요? 무언가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누군가 그렇게 작동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피아노를 보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코끼리가 나무에 부딪혔는데, 마침 나무에 하프 연주자가 앉아 있었고, 그 모든 것, 그러니까 상아와 나무와 현이 우연히 모여서 피아노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이처럼 설계된 무언가가 있다면 반드시 설계자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두번째 방법은 존재론적 논증입니다. ‘존재론적’에 해당하는 영어 ‘ontological’은 헬라어 '온토스(ontos)'에서 유래했는데, '존재하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분사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가리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진정한 속성을 이해하고 개념화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합니다. 세번째 논증은 미학적 논증입니다. 아름다움과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주 어딘가에 근거가 되는 절대적 기준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는 것이죠. 의지적 논증도 있습니다. 인간에게 수많은 선택의 기회가 있고, 그것을 선택할 의지가 있으며, 개인의 의지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어딘가에 무한한 의지가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바로 그 무한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마지막으로 도덕적 논증도 있습니다. 우리가 옳고 그름을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절대적 기준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오늘 아침 2부 예배가 끝난 뒤에 한 성도님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제 친구가 세상에는 옳고 그름이란 게 없다고 믿어요. 절대적인 옳고 그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제가 뭐라고 말해줘야 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친구에게 이렇게 물어보세요. 기관총을 들고 학교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어린 아이들을 마구잡이로 쏘아대도 괜찮은 거냐고요." 그 순간에도 여전히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바보일 겁니다. 그리고 만약 이 세상에 옳고 그른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어딘가에는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준이 있다면, 우리는 그 기준을 통해 다른 것들이 옳은지 그른지도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도덕성 논증입니다.
또 하나의 논증은 '우주론적 논증(cosmological argument)'입니다. 누군가 농담처럼 'cosmetology(미용술)'라고 했던 것과는 다릅니다. 우주론, 즉 ‘cosmology’는 원인과 결과의 논증입니다. 우주에 대한 관점은 두 가지뿐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관점과,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관점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만,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없다"는 주장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아무도 없는 상태가 모든 것을 만들어냈다"는 식의 논리입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우주를 바라보면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아무도 없는 상태가 모든 것을 만들어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어떤 분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어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훨씬 더 합리적입니다. 우주론은 바로 이 '원인과 결과의 논증'입니다. '코스모스(kosmos)', 이 세상, 즉 결과로서의 우주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보며 "누군가 이 세상을 창조했다"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할수록 그 창조자가 어떤 분이신지를 더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면, 영원한 움직임의 근원은 강력해야 합니다. 복잡성의 근원은 전지해야 합니다. 의식의 근원은 인격이 있어야 합니다. 감정의 근원은 감정이 있어야 합니다. 의지의 근원은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윤리적 가치의 근원은 도덕성을 가져야 합니다. 종교적 가치의 근원은 영적이어야 합니다. 아름다움의 근원은 그 자체로 미적이어야 합니다. 의로움의 근원은 거룩해야 합니다. 정의의 근원은 공정해야 합니다. 사랑의 근원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생명의 근원은 살아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무한하고, 영원하며, 전능하고, 어디에나 계시며, 모든 것을 아시고, 인격이 있으며, 감정이 있고, 의지가 있고, 도덕적이고, 영적이며, 심미적이고, 거룩하고, 공정하고, 사랑 그 자체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셔야 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세상에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면 이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증명해 줍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계십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글쎄요,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믿으려면 정말 무지한 사람이어야 할 텐데요." 아닙니다. 성경은 시편 14편 1절과 시편 53편 1절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죠. 하지만 제가 하나님이 계시다고 확신하는 것은 세상을 설명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제가 하나님을 너무나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끔찍한 상황에 처한 한 무신론자가 결국 하나님을 찾게 되었을 때, 누군가가 그에게 "왜 하나님을 찾으시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무신론자는 "하나님이 안 계시더라도, 이런 때를 위해서라도 계셔야 할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느끼는데, 여러분도 그렇지 않으신가요? 만일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해도 계셔야만 합니다. 우리는 혼란 속에서 살아갑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 가장 확실한 이유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싶은 제 간절한 소망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사는 삶의 모습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역사상 유명한 무신론 철학자들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서 그들의 말년이 어떠했는지를 연구해 보면 정말 흥미로울 겁니다. 이들은 역사상 가장 암울하고 절망적이며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보죠. 볼테르(Voltaire)는 생의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몇몇 현인들을 제외하면 인류라는 것은 불행한 죄인들의 끔찍한 집단에 불과하고, 지구는 시체로 가득 찬 곳일 뿐이다. 이 존재의 근원을 다시 한 번 원망해야 한다는 사실에 몸서리치며, 이 끔찍한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르낭(Rena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텅 빈 항아리에서 나는 향기만으로 살아가고 있다." 또 다른 무신론자 H.G. 웰스(H.G. Well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빠져나갈 길도, 우회할 길도, 통과할 길도 없다. 이것으로 끝이다." 로버트 잉거솔(Robert Ingersoll)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은 두 영원이라는 차갑고 메마른 봉우리 사이의 가느다란 장막과도 같다. 우리는 그 높은 봉우리 너머를 보려 애를 쓰지만 헛될 뿐이다.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돌아오는 것은 우리의 절규가 만든 메아리뿐이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 빵 한 조각을 위해 땀 흘리며 고된 노동을 한다. 서로 다투고 비난하고 싸운다. 사소한 이득을 얻기 위해 발버둥치다 보면 어느새 나이가 든다. 병이 찾아오고, 부끄러움과 굴욕이 자존심과 허영심을 짓밟아버린다.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둘 떠나보내면서 삶의 기쁨은 깊은 슬픔으로 바뀌어간다. 고통과 근심, 비참함의 무게는 해가 갈수록 더욱 무거워진다. 마침내 야망은 죽고, 자존심은 죽고, 허영심도 죽는다.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오직 해방에 대한 갈망뿐이다. 마침내 죽음이 찾아온다. 이 세상이 준 유일한 순수한 선물이다. 이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으며, 실수요 실패요 어리석음이었던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존재했다는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하루 정도 애도받다가 영원히 잊혀질 이 세상에서 말이다. 그러면 또 다른 무리가 이들의 자리를 채우고, 앞선 이들이 했던 모든 것을 그대로 반복하며, 같은 헛된 길을 걷다가, 앞선 이들처럼 사라져간다. 그리고 또 다른 이들이, 또 다른 이들이, 수백만의 무리가 똑같은 메마른 길을 똑같은 사막에서 걸으며, 첫번째 무리와 그 뒤를 이은 모든 무리가 이루었던 것과 똑같은 것을 이룬다. 바로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말이다."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자신들이 만들어낼 결과를 전혀 예측하지 못한 원인들의 산물이다. 인간의 기원, 성장, 희망과 두려움, 사랑과 신념은 단순히 우연한 원자들의 결합이 만들어낸 결과일 뿐이다. 그 어떤 불꽃도, 영웅적 행위도, 그 어떤 강렬한 생각과 감정도 한 개인의 생명을 죽음 너머로 보존할 수는 없다. 수많은 시대를 걸쳐 이루어진 모든 노력과 헌신, 영감, 인간 지성의 찬란한 빛은 태양계의 거대한 죽음 속에서 소멸될 운명이며, 인류가 이룩한 모든 것들은 필연적으로 무너진 우주의 잔해 아래 묻히고 말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완전히 확실하지는 않더라도, 이를 부정하는 어떤 철학도 설 자리가 없을 만큼 거의 확실한 사실이다." 정말 암울한 인생관 아닙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는 모든 곳에 있습니다.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라면 분명 진리를 찾고자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안다면 말이죠. 하나님을 믿을 때 얻는 결과는 밝고 희망적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왜입니까?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T.B. 라리모어(T.B. Larimore)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내 믿음은 그 어느 때보다 굳건하다. 내 소망은 그 어느 때보다 밝다. 내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맑고, 내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다. 내 삶은 그 어느 때보다 순전해졌다. 나는 모든 이를 사랑하고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을 향한 내 사랑은 내 영혼을 고귀한 경지로 끌어올린다. 나는 오늘 죽을 준비가 되어 있고,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천 년을 더 살 준비도 되어 있다. 내 친구들은 더욱 소중해졌고, 함께하는 시간은 더욱 달콤해졌다. 고통받는 영혼들을 향한 내 연민은 더욱 깊어졌다. 작은 봉오리에서부터 꽃, 갓난아기에서부터 모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이르기까지, 순수하고 진실하며 아름답고 선하며 숭고한 모든 것을 향한 내 사랑은 그 어느 때보다 진실되고 따뜻하며 달콤하다. 나는 편히 잠들고 달콤한 꿈을 꾸며 늘 기쁨 가운데 있다." 글쎄요,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삶을 마무리하고 싶으신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렇게 끝맺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단 하나의 큰 기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였고 이로 인해 모든 것이 이해됩니다. 그러나 그 하나의 큰 기적을 부정하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계십니다.
두번째 요점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실까요? 하나님은 분명히 존재하시는데 이 하나님은 누구실까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아, 조금 전에 힌트를 드렸는데요, 잠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눠드린 개요에 세 가지 요점이 있는데, 이 세 가지를 아우르는 일반적인 요점을 하나 추가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실까요? 우선 첫째로, 하나님은 인격체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체이십니다. 하나님은 우주 공간을 떠도는 에너지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주에 어떤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힘은 알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틀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격적 존재라고 믿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인격은 인격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격을 가진 존재죠. 우리의 인격을 이루는 모든 것들은 인격적 존재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인격적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인격적이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을 인격적 존재로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인격적 호칭을 부여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아버지로 불리십니다. 또한 목자로도 불리십니다. 하나님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용어들은 하나님을 인격적 존재로 설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는 인칭대명사를 사용합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는 항상 하나님을 인칭대명사로 지칭하지, 절대로 사물대명사로 지칭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을 지니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생각하시고, 행동하시며, 느끼시고, 말씀하십니다. 소통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격의 특성입니다. 성경의 모든 증거는 하나님이 인격적 존재임을 나타내고 있으며, 창조와 우리의 인격 역시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인격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세 가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라고 말합니다. 민수기 23장 19절이죠.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또 예수님은 누가복음 24장 39절에서 "영은 살과 뼈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육체가 아니십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나요?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여호와께서 그 오른손 그 능력의 팔로 맹세하시되…’” 네, 맞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인동형론’입니다. 무엇일까요? 마치 하나님이 인간인 것처럼 인간의 모습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글리프로 땅을 감찰하사"라고 한다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신다"라고 할 때 우리가 아는 것은 귀로 듣는 것뿐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귀를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인간적인 표현으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람처럼 표현한 것이죠. 하지만 어떤 이단들처럼 하나님을 인간과 동일한 존재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성경에 이런 표현도 있지 않습니까?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하지만 하나님은 새가 아니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이 아닌 영이십니다.
디모데전서 1장 17절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려면 하나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쉐키나 영광으로, 때로는 빛으로, 때로는 불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또 이 세상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에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든 나타내실 수 있으며, 어떤 보이는 형태로 제한하여 자신을 계시하실 수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저는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사실이 참 감사합니다. 어디에나 계시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주에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첫째로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여러 신들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한 분의 하나님만이 계실 뿐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신명기 6장 4절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말씀이자 유대인들에게 있어 모든 것의 핵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이게 전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신들이 있는 다신교 사회 속에서 살면서도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나중에 오셔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예수님이 두번째 하나님 아닌가요? 최소한 두 분이 계신 게 아닌가요?" 아닙니다. 마가복음 12장에서 흥미로운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개념에 대해 자신을 어떻게 보셨는지 말입니다. 마가복음 12장 29절에서 예수님은 "첫째는 이것이니"라고 하시며 다시 강조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잘 들으십시오. 만일 예수님께서 "’하나님-하나님’ 외에 ‘예수-하나님’이 있고 우리 둘 다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시려 했다면, 절대로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라고 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리고 이어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자신을 동등한 위치에 두고 "나는 또 다른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셨다면, "너희의 충성을 우리 둘에게 나누어라"라고 하셨어야 합니다. "너의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자신이 그 유일한 한 분이심을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그 하나님이 바로 자신임을 주장하신 겁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예수님 자신의 신성에 대한 위대한 선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시면서도 동시에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두 위격이 있지만 한 하나님이다. 그래서 그 한 하나님께 모든 충성을 바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직 한 하나님만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쟁도 없습니다. 충성심을 나눌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이 구절이 가진 힘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또 다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많은 신들을 숭배하는 이교도 사회에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곳곳에 우상들이 있었고, 사람들은 자신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보통은 먹을 것을 바쳤습니다. 마르스나 다이아나, 아르테미스 같은 신을 숭배하고 싶으면 신전에 음식을 가지고 가서 자기가 섬기는 신 앞에 바치면 됐습니다. 물론 신전에 그런 신 따위는 없었지만 그걸 모른 채로 음식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그 음식은 그대로 있지 않았습니다. 신전을 관리하는 제사장들이 나와서 그 음식을 가져가서 뒤편에 있는 작은 시장에서 팔았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일이겠죠. 돈도 벌고, 사람들은 우상을 섬길 수 있고, 신전 운영도 할 수 있으니까요.
이처럼 신전 제사장들은 우상 뒤에 있다가 신도들이 가져온 제물을 되팔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리스도인들이 시장에서 좋은 식재료를 고르다가 그 음식을 사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신전 뒤편에서 나왔다는 것이죠. 그래서 일부 성도들은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을 먹는 다른 성도들을 매우 불편해했습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이 음식 어디서 샀어?"라고 물으면 "거기서 샀는데…" "아, 나는 그거 못 먹어. 우상에게 바쳤던 거잖아"라는 대화가 오갔습니다. 이런 식으로 성도들의 교제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알려주기 위해서 이 편지, 고린도전서를 쓰게 된 겁니다.
고린도전서 8장 4절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핵심입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니 마음 편히 사라. 좋은 가격이라면 사도 된다. 맛있게 먹으라. 아무런 차이도 없다. 어차피 신전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다." 바로 이것입니다. 한 분뿐입니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잘 들으십시오. "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잠깐만요. 하나와 하나면 둘이 되는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이제부터 잘 들으십시오. 만물이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났고, 동시에 만물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말미암았으며,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났고, 또한 우리가 주 예수님으로부터 났다면, 이 두 분이 동일한 분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보십시오, 하나님을 둘로 나누지 않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도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신앙생활을 간결하게 만들어 드리죠. 한 하나님이지 여러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잠깐만요, 존 목사님, 시편 82편에서는 다른 말을 하던데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시편 82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너희는 신들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너희가 신들이라는 게 무슨 뜻일까요? 많은 신들이 있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시편 82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본질이 아닌 직분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너희들은 하나님의 자리에서 심판하고 있다." 이제 그 의미를 아시겠죠? "너희는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심판하고 있다. 너희는 하나님의 권위의 자리에 앉아 있지만 그 권위를 왜곡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다음 구절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멸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 신들이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을 테니까요. 그리고 다음 구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심판하소서."
셋째로, 이걸 셋째로 말씀드리는 게 참 적절한데요, 하나님께는 세 위격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한 분이시며, 동시에 세 위격이십니다. 사람들은 늘 "삼위일체는 증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삼위일체를 증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는 겁니다. 계속해서 한 분이시면서 세 위격이신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될 테니까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진리입니다. 흥미로운 구절을 몇 개 보여드리겠습니다. 창세기 1장은 "태초에 하나님이"라고 시작하는데, 여기서 '하나님'이란 단어는 '엘로힘'입니다. 히브리어에서 'im'으로 끝나는 단어는 모두 복수형입니다. 영어의 's'처럼 말이죠. dogs, cats, 이렇게 말입니다. 'im'은 복수형을 나타냅니다. "태초에 하나님들이", 복수형이지만, 단수 개념인 하나님을 복수로 표현한 겁니다. 이렇게 삼위일체는 성경의 첫 구절부터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3장에서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의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말씀하시죠. 한 장면, 한 단락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모두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갈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서 구하면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14장 16절부터 17절에서 세 위격이 모두 언급되고 있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영적 은사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세 구절에 걸쳐서 삼위일체의 세 위격이 또다시 언급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 영어 성경에서는 14절 하반절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한 구절 안에 세 위격이 다 계십니다. 베드로전서 1장 2절도 마찬가집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여기도 한 구절 안에 세 분이 계시죠. 성경 전체에 걸쳐 나오는 수많은 예시 중 일부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면서 동시에 세 위격이십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라고 물으실 수 있겠는데, 저도 모릅니다. 전혀 감이 오지 않습니다. 사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진정한 본질에 비하면 우주의 모든 모래알 중 단 하나의 모래알에 불과할 겁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순 없습니다. 삼위일체를 이해하려다 보면 침대 밑에서 헬라어 알파벳을 중얼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방법이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으면 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세 위격이라는 것은, 옛 이단인 양태론이나 사벨리우스주의처럼 하나님이 변장을 하시는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단들은 하나님이 마치 옷장에서 나와서 하나님 역할을 하시다가, 짜잔 하고 다시 들어가서 성령의 옷을 입고 나와서 그 역할을 잠시 하시다가 다시 또 들어가신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실제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면서 동시에 세 위격이십니다. 또 다른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달걀처럼 노른자, 흰자, 껍질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물처럼 얼음, 물, 수증기로 존재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도 맞지 않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하나님이 마치 빛과 같아서 주변을 밝게 비추고 따뜻하게 하고 에너지를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저 하나님이실 뿐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전구도, 달걀도, 물도 그분과 같을 순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삼위일체이십니다. 저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저 믿을 뿐입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다행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면 제가 하나님과 동등해진다는 뜻일 테고, 그렇게 되면 모두가 큰 혼란에 빠지게 될 테니까요.
하나님은 누구실까요? 하나님은 인격이시며, 영이시고, 한 분이시면서 세 위격이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의 속성 열 가지를 설명드리겠지만, 지금은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우리와의 관계를 떠나서, 하나님 자체로서는 어떤 분이실까요? 첫째로, 오늘은 이것만 살펴볼 겁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는 분입니다. 이 놀라운 개념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시편 102편 26절부터 27절입니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십니다. 말라기 3장 6절에서는 하나님이 야곱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말라기 3장 6절입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조금의 변화도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변화란 더 나아지거나 더 나빠지는 것 둘 중 하나입니다. 그렇죠? 이 두 가지 모두 하나님께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더 나아지실 수도 없고 더 나빠지실 수도 없습니다. 변화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다른 모든 것과 구분 짓는 특징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변하니까요. 하늘도 변합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여기저기 움직이면서 궤도를 바꾸다가도 정해진 궤도대로 움직이죠. 계시록 6장에서 19장까지를 보면, 언젠가 주님께서 온 하늘을 무너뜨리실 거라고 합니다. 덜 익은 무화과가 떨어지듯 별들이 떨어지고,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릴 것입니다. 해는 빛을 잃고 달은 피처럼 변하며 하늘의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될 것입니다. 하늘은 분명히 변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불도저로 지형을 바꾸고 공해로 대기를 오염시키면서 땅을 계속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계시록 6장에서 19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지구의 표면을 움직이셔서 모든 것들을 크게 바꾸실 것입니다. 바다가 오염되고 강도 오염될 겁니다. 대부분의 풀과 식물들이 죽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 겁니다. 45킬로그램이나 되는 우박이 떨어지는 끔찍한 재앙이 일어날 겁니다. 지구의 모습이 바뀔 겁니다. 이미 대홍수로 한 번 바뀌었는데, 또 다시 바뀔 겁니다. 지구가 사라질 때 모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질 겁니다. 불경건한 사람들도 변합니다. 이들은 늘 변하죠. 충성심도 바뀌고 태도도 바뀝니다. 언젠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이들의 정체성은 완전히 바뀔 것입니다. 자신들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하나님 없이 영원을 보내게 될 때는 비극으로 바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성인들(saints)도 변합니다. 우리 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도 변합니다. 우리는 늘 변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존 맥아더는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동일하다"라는 말, 어떻게 들리십니까? 좋게 들리지는 않죠? 저는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동일하지 않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저도 변합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제 사랑이 불타올라 온전히 순종하는 때도 있고, 그 사랑이 식어서 불순종하는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늘 변합니다. 또한 가장 훌륭한 성인들조차도 변합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는…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사무엘하 22장 3절입니다. 우리는 "다윗은 정말 대단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또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잠깐만요 다윗, 하나님이 지켜주실 거라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하나만 정하세요. "음, 제가 좀 흔들리네요." 네,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문제가 해결된 뒤에야 위대한 문제 해결사로 보이죠. 천사들도 변합니다. 유다서 1장 6절에 천사들이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았다"고 나와 있다는 걸 아십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모든 피조물이 변합니다. 하나님은 절대 변하지 않으시고,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말씀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장 강하게 드러내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주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바로 하나님이시죠.
그렇다면 경건한 사람들에게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리스도인인 저에게 하나님이 변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잘 들으십시오. 한번 저를 사랑하셨다면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한번 저를 용서하셨다면 영원히 용서하신다는 뜻입니다. 한번 저를 구원하셨다면 영원히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한번 저에게 무언가를 약속하셨다면 그것은 영원한 약속이 됩니다.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로마서 11장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으시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이 사실이 감사하지 않으신가요? 하나님은 저를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맥아더야, 너는 정말 눈엣가시구나. 하지만 나는 여호와라 변함이 없다." 그리고 성경에서 가장 강력한 구절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모르실 수도 있으니 잠시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디모데후서 2장 13절입니다.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여러분의 구원과 안전의 근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엇이 근거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변치 않으시는 성품, 하나님의 절대적인 본성입니다. 예레미야 31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한번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46장 10절에서는 나의 뜻이 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가 완전한 변화를 겪어야 한다는 것이 참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변함없으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우리가 철저히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너는 거듭나야 하리라"고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맥아더 목사님, 다른 성경 구절들은 어떻게 설명하실 건가요? 아모스 7장, 창세기 6장 6절, 요나 3장 10절에는 '여호와께서 후회하셨다'고 나와 있는데요?" 맞습니다. 하지만 민수기 23장 19절에서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주님께서 후회하지 않으신다고 하면서 세 번이나 후회하셨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상황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상황을 보지 않고 한꺼번에 묶어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십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결코 변하지 않으시죠. 하나님은 뜻을 바꾸시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 안에서 특정 상황에 따라 변화를 주실 수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너희가 무너지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왜일까요? 죄악이 가득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잠시 여행을 한 뒤에 결국 니느웨에 도착했죠. 요나가 니느웨에 말씀을 전하자 온 도시가 회개했고, 하나님은 이를 보시고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뜻을 바꾸신 걸까요? 아닙니다. 변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니느웨 백성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네가 이대로 계속 행한다면 벌을 받으리라’고 하셨고, 니느웨 백성들이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대홍수 이전 문명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복을 주시려고 인간을 만드셨는데, 인간이 하나님의 원칙을 어기는 바람에 저주하실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결코 변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같았습니다. 선한 것은 상주시고 악한 것은 벌하시는 것이었죠. 단지 대상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태양이 밀랍은 녹이고 진흙은 굳히는 것을 태양 탓으로 돌릴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태양이 아닌 물질의 성질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어떤 자세로 서 있느냐가 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을 결정하는 겁니다. 인간의 눈에는 하나님이 변하신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자전거를 탈 때와 같습니다. 맞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보신 적 있으신가요? 강한 바람을 힘겹게 뚫고 가다가 목적지에 도착해서 돌아서면 휭하고 바람이 등을 밀어주죠. 그때 우리는 "아, 바람이 바뀌었구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람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바뀐 거죠.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 변함이 없으십니다. 늘 한결같으셨습니다. 선한 것은 상주시고 악한 것은 벌하시죠. 이 모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뜻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하나님이 한탄하셨다, 또는 후회하셨다"라는 말씀은 "아, 내가 실수를 했으니 다르게 행해야겠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실 수밖에 없었던 일을 사람들이 행동을 바꾸자 하시지 않게 되었거나, 하나님이 원래 하시지 않으려던 일을 사람들이 행동을 바꾸자 하시게 되었다는 그런 뜻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결코 변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같았죠. 악한 것은 벌하시고 선한 것은 상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고 결코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인 여러분,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에게는 정말 가슴 뛰는 일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소유이기에 하나님이 저를 돌보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약속하신 것이 있다면, 그 약속은 영원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는 말씀은 1950년에 하나님의 공급이 바닥나서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약속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저는 이 사실에 든든함을 느낍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으신가요?
그렇다면 불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불변성이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이 "죄를 짓는 영혼은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삯은 사망이니"라고 하신 것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지옥이 있다"고 하신 것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지금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과거에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미래에도 정확히 그대로 이루어질 겁니다. 시편 119편 89절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얼마나 오래인가요?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중 어떤 이들에게는 이것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입니다. 또 어떤 이들에게는 두려움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 함께 말씀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말씀을 통해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언제나 자비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은혜와 뜻 안에 있는 우리 믿는 자들을 도우소서. 하나님 아버지의 바람을 등에 싣고 살아감으로써 영원한 안전과 피난처와 복이 우리의 것임을 깨닫게 하시고,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또한 바람을 거스르는 자들, 아버지의 뜻과 은혜에 맞서는 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이 아버지께로 돌이킬 때 아버지께서도 돌이켜 주옵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아버지와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옵소서.
여러분이 고개를 숙이고 계신 이 시간,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아침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서 아직 그리스도께 삶을 맡기지 않으신 분, 아직 마음을 열지 않으신 분이 계시다면, 변함없으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있는지 궁금하십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과 구주로 영접할 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고, 하나님의 든든한 팔이 영원토록 여러분을 안전하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이런 결단이 생겨나기를 기도합니다. 이미 그리스도를 알고 계신 분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영원히 우리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지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 이 귀한 교제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소중한 생명으로 인해 감사합니다. 주님의 임재에 감사합니다. 성령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시며, 주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 필요한 일들을 이루어 주시고, 변함없으신 주님이 약속하신 모든 복을 충만히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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