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베소서 5장 18절부터 21절을 보겠습니다. 읽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토록 놀라운 말씀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성령 충만이라는 이 위대한 개념을 다루기에 저는 한없이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오늘 이 주제를 다루는 것은 성령 충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실제적이고 필수적인 요소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주님, 제가 말씀을 전할 때 지혜를 주시고 듣는 모든 이들에게 지혜를 주셔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고 순종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지금 우리는 계속해서 에베소서를 한 구절씩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합당하게 행해야 한다는 것, 특정한 방식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지침을 명확하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에베소서 4장과 5장까지 살펴봤고, 앞으로 6장도 공부하게 될 겁니다. 이 모든 장은 그리스도인이 실제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이 5장 18절에 나옵니다. 만일 5장 18절이 에베소서에 없었다면 에베소서는 결코 완성되지 못했을 겁니다. 이 한 구절이 빠지는 순간 모든 내용이 그저 율법주의가 되고 말기 떄문입니다. 이 구절이 없다면 여러분은 1장부터 3장이 묘사하는 멋진 엔진, 멋진 자동차가 되고, 4장부터 6장이 묘사하는 지도를 얻을 수는 있겠지만, 어디로도 갈 수 없을 겁니다. 연료가 없기 때문입니다.
5장 18절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아름다운 말씀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육신대로만 살게 될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 모든 것의 핵심이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열쇠이자 모든 것의 기초입니다. 성령님의 능력 없이는 우리가 겸손하게 살 수도, 하나됨 가운데 살 수도, 세상과 다르게 살 수도 없습니다. 빛 가운데 행할 수도, 사랑으로 행할 수도, 지혜롭게 행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영혼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이러한 삶을 살게 하는 유일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도 이렇게 살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18절에 이 문제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우리에게 이해의 지평을 열어주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5장 18절을 순종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15절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지혜 없는 자는 누구일까요? 겸손한 하나됨의 삶을 살면서, 사랑 가운데 행하고, 빛 가운데 행하며, 지혜 가운데 행하고, 하나님의 모든 뜻을 이루려 하면서도 육신으로 행하려는 자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하든지 반드시 성령의 능력으로 행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느낍니다. 어떤 이들은 일종의 신성한 짜릿함을 느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방언을 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성령 충만을 경험한 적이 있나요?"라고 물어보곤 합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구분짓습니다. 충격을 받아본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는 것이죠. 어떤 황홀경을 경험했다면 성령 충만을 받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받지 않은 것이라고 하면서 이 개념을 놓고 여러 가지 해석과 논쟁을 합니다. 한쪽에서는 성령 충만을 받으면 어떤 황홀경적 짜릿함을 느낀다고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아주 금욕적으로 접근해서는 단순히 성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실제 삶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죠. 하지만 둘 다 틀렸습니다. 성령 충만은 금욕적인 것도 아니고 황홀경적 충격도 아닙니다. 둘 다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매우 심오한 현실입니다. 오늘 아침 최선을 다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세 가지 요점을 중심으로 말씀드렸죠. 대조와 명령, 결과입니다. 대조는 이미 살펴봤고 결과는 다음 시간에 볼 예정이니까 오늘은 명령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그 명령은 바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입니다. 혹시 잊으셨거나 지난주에 오지 못하신 분들을 위해서 대조 부분을 다시 한번 짚어드리겠습니다.
18절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아소티아(asotia)한 것이니.” 여기서 아소티아는 방탕이나 방종, 혹은 치유할 수 없는 절망적인 병을 의미합니다. 술 취함의 결과가 이렇다는 겁니다. 이어서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죠. 이렇게 술 취함과 성령 충만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지난 몇 주간 말씀드린 것처럼 이교도들은 술에 취해야 신들과 교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의 주된 관심사는 사회적 측면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사회적으로도 그래야 하죠.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취하도록 술을 마셨더라도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는 그러면 안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실제로 강조하는 것은 신학적인 부분입니다. 이교도들은 술에 취함으로써 어떤 높은 수준에 도달해서 신들과 교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교도들은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술에 취했습니다. 심지어 술을 더 마시기 위해 일부러 토하기까지 했는데,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그런 목적으로만 사용된 구덩이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술에 취해 어리석어져야만 신들과 교감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사도 바울은 이를 매우 강하게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할 때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라. 이 모든 것을 술 취함이 아니라 성령 충만함으로 하라.” 완전히 다른 방식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느끼는 기쁨과 즐거움, 하나님과의 교제, 우리 예배의 기초와 동기가 모두 성령 충만함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이교도들의 사악하고 추악하며 방탕한 예배는 악한 음악, 부도덕한 춤, 성적 타락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두 술에 취한 상태에서 이루어졌죠. 반면 우리의 진정한 예배, 아름다운 음악, 하나님과의 교제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집니다. 바울은 이교도들의 술 취한 방탕한 예배와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령 충만한 아름다움 사이의 이런 극명한 차이를 지적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런 것들을 모두 버리고 성령 충만함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성경에 흔히 나타나는 대조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장 15절을 살펴보면 세례 요한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자세히 다뤘죠.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이제 세례 요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나옵니다.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여기서도 동일한 대조를 볼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술을 마시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포도주나 독한 술이 아닌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하심을 받을 것입니다. 술이 아닌 하나님의 영의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알코올이 뇌에 미치는 영향이 아닌 성령님의 영향으로 움직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많은 사람들이 술에 취해 이끌리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도 동일한 대조가 나옵니다. 2장 4절을 보면 오순절 날에 제자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제자들이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는데, 9절에 그 언어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10절과 11절에도 나옵니다. 제자들은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이 모든 언어들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전했습니다. 주님께서 이런 능력을 기적적으로 주셨습니다. 중요한 점은 오순절 날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즉, 성령 충만함을 받은 후에 다른 언어들로 말할 수 있었습니다.
12절을 보면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글류코스(gleukos),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그저 이교도 축제일 뿐이고 전형적인 이방인들의 종교 행위일 뿐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매우 불쾌했을 겁니다. 이방인들이 술에 취해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봤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바로 그런 일이라는 겁니다. 이방인들이 드리는 종교의식으로 타락했다는 것이고, 이교도적인 것으로 빠져들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는 방식으로 예배를 드렸고,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이 일부러 술에 취했다는 말입니다.
글류코스(gleukos)는 헬라어로 새 포도주를 뜻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벌써 새 포도주에 취해 있네.” 말하자면 조롱한 것이죠. “일부러 술에 취하다니 전형적인 이교도들이나 하는 짓이군. 누가 저들의 말을 듣겠어?” 이때 베드로가 일어나 말합니다. 15절입니다.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한 것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어리석기 때문에 때로는 이교도적 예배와 진정한 예배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대조가 성경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겁니다.
다시 에베소서 5장 18절을 보면 동일한 대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바울은 이 말씀을 기록하면서 오순절 사건을 떠올렸을 겁니다. 사도들과 제자들이 처음으로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했던 그날을 생각했을 겁니다. 당시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 눈에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보였고, 이교도 방식으로 예배드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대조가 나오는 겁니다.
이제 이 명령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이 놀라운 진리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고 전에 살펴본 바 있지만, 처음 듣는 분들도 계시고 새로 오신 분들도 계실 테니까 천천히 설명하겠습니다. 정말 깊이 있는 명령입니다. 18절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이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이라는 점입니다. 헬라어에는 사실을 진술하는 직설법이 있고 명령을 나타내는 명령법이 있는데, 이 문장은 명령법입니다.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믿는 자들을 향한 명령입니다. 선택사항이나 제안이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은 제안을 거의 하지 않으십니다. 명령하시고 사실을 말씀하실 뿐 제안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선택지가 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것 역시 선택사항이 아닌 명령입니다.
자칭 기독교인들은 성령 충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 원칙에 전혀 헌신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지키지 못할 때가 많지만 성령 충만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특히 요즘 기독교인들을 보면 더욱 우려됩니다. 기독교인이면서도 성령 충만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자료와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고, 그런 논의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중간에 새로운 범주가 하나 생긴 것 같습니다. 한쪽에는 구원받지 못하고 거듭나지 못해 지옥으로 가는 자연인이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말씀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께 순종하고, 진리와 계명과 빛 가운데 걷는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그 중간에 새로운 범주가 있습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무관심한 사람들입니다. 지옥에서는 건져냈지만 참된 기독교인으로서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이죠. 말하자면 헌신되지 않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어제 한 저명한 신학자의 글을 읽었습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결코 빛 가운데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군요.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둠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들어왔고,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게 되었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그 신학자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구원은 받았는데 영원히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구원은 받았는데 아무 변화도 없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편리한 분류법 하나가 생겼습니다. 자연인, 영에 속한 사람, 그리고 육신에 속한 사람으로 나누는 겁니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을 이 범주 중에서 하나에 넣어버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괜찮습니다, 당신은 구원받았으니 천국에 갈 겁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어쨌든 잘될 겁니다. 구원을 잃지는 않을 테니까요. 천국에 들어가긴 할 텐데, 다만 우리보다 좋은 집에 살지는 못할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어쨌든 천국이니까요." 이렇게 우리는 아주 편리한 분류법을 만들어냈지만, 하나님의 관점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너희가 헌신된 사람이 되고 싶다면 이렇게 하고, 그냥 육신적으로 살고 싶다면 그렇게 하거라.” 주님은 이런 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준이며, 저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선택사항이 아닌 구원받는 믿음의 필수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인이 되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편한 범주에 머물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의 영으로 충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보다 못한 것은 명백한 불순종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삶이 불순종으로 가득하다면 요한일서는 여러분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이 중요한 겁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참 그리스도인은 성령 충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난 다음 단계로 올라가지 않겠어"라고 하면서 육신적인 상태로 편하게 살 수 없습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성령 충만이 명령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자에게 필수적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는 순종 이외에는 다른 선택지란 없습니다.
이제 “충만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충만이란 무슨 뜻일까요? 여러 가지를 말씀드릴 텐데, 아주 흥미로울 겁니다. 그리고 기본적인 것들을 확실히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자,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첫째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미 성령님을 받았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님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한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저에게 성령이 없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구하고 나서 성령을 받으니까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오랫동안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성령이 없었답니다. 그 분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 경험은 성령을 새로 받은 것이 아니라 순종했을 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믿는 그 순간부터 성령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없는 그리스도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안에 계신 하나님의 생명이 바로 구원의 실체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여러분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는 그리스도인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8장 9절입니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 보겠습니다. 참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참고로 성경에서 ‘육신적’ 또는 ‘육체적’이라는 단어는 대부분 그리스도인이 아닌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지칭할 때 사용됩니다. 좋은 예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7절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여기서 육신에 있다는 것은 구원받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즉, 육신에 있다면 구원받지 못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저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일 뿐이에요.” 하지만 실제로는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오는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로마서 8장처럼 육신에 있어서 전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자신의 육신적인 상태에 편안함을 느낀다면 정말 구원받았는지 돌아보셔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의 육신적인 상태가 아니라 로마서 8장의 육신적인 상태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육신적으로 행동하는 그리스도인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육신성은 주로 불신자들의 특징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이고,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으며, 복종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영에 있다고 합니다. 육신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바울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되면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영에 있게 됩니다. 9절 하반절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보이시나요? 성령님이 없다는 것은 육신적이라거나 아직 성령님을 받지 못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받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께 속하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복잡한 개념이 아닙니다. 9절 하반절을 다시 읽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절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즉, 만일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다면 여러분은 성령을 소유하고 있는 겁니다.
저는 여러분이 처음부터 이 점을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새신자 여러분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성령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충만하고 온전하게 우리 안에 계십니다. 양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조금씩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성령을 더 주세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더 받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충만히 계십니다. 모든 믿는 자는 성령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제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을 보겠습니다. 동일한 사실을 다루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3절입니다. 이 구절은 동일한 점을 강조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고린도교인들이 육신적인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세속성은 기독교인의 세속성을 잘 보여줍니다. 여러 면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처럼 살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들 중 일부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가장했을 뿐이죠. 바울은 그런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죄악이 가득한 사람들에게, 죄악이 가득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모두 한 성령을 마셨습니다. 모든 신자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 세례는 경험이 아닙니다. 성령 세례는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느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성령 세례를 받을 때 육체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듯 우리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 세례란 우리가 믿을 때 성령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체험이 아닌 신학적 사실입니다. 세례를 주시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구원을 받을 때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가 되고, 13절 하반절에 나오듯 "성령을 마시게" 됩니다. 즉,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모든 신자들이 세례를 받았고 한 성령을 마셨습니다. 성령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이제 고린도전서 6장 19절을 보겠습니다. 6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부도덕한 행위를 지적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음행을 저지르고 창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등 부패하고 악하고 비열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을까요? “성령을 받아서 정결하게 할지니라.”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건 성령이다, 성령만 받으면 이런 문제가 없어질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성령을 받으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게 될 거라고 말하는 대신, 이미 너희 안에 계신 성령을 더럽히고 있으니 그런 행동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너희 몸이 성령의 전인 줄을 모르느냐? 너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성령을 더럽히고 있다는 걸 모르느냐?" 보시다시피, 그리스도인이 죄 가운데 살더라도 성령님은 여전히 그 안에 계십니다. 아시겠습니까? 성령은 여전히 그 안에 계시지만 더럽혀진 상태로 계십니다. 에베소서 4장 30절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입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우리는 성령을 소멸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거룩한 불꽃 위에 죄라는 물을 부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근심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그것’이 아닌 ‘그분’이십니다. 인격체이십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슬퍼하시고 애통해하시며 괴로워하십니다. 우리의 몸인 성전을 더럽히면 성령님도 더럽힘을 당하십니다.
모든 신자는 성령을 소유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신자는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한 성령을 마십니다. 모든 신자는 성령의 전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아시겠나요?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을 보겠습니다.
제가 처음 이 교리를 깨달았을 때, 우주의 하나님, 참 하나님이신 하나님, 하나님 자신, 주권자이자 전능하시고 존귀하신 분께서 제 안에 거하신다는 것이 그저 놀랍기만 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지요. 그리고 이것이 바로 신약의 진리입니다. 요한복음 7장 37절입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누가 생수의 강을 받습니까? 믿는 자, 누구든지 믿는 자입니다. “목마르니 마시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이 생수의 강은 무엇입니까? 39절입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자, 성령을 누가 받습니까? 바로 믿는 자들입니다. 보십시오. 구원받는 믿음을 통해 성령을 받게 됩니다. 성령님은 생수의 강이 되셔서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하십니다. 절대 잃을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믿는 자 안에 영원히 거하십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잘 들으십시오, 신약성경의 모든 명령 중에서, 수많은 명령이 있지만, 신약성경의 모든 명령 중에서, 주목하셔야 합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정말 하나도 없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성령 세례에 대한 언급이 일곱 번 나옵니다. 하지만 그 중 어느 것도 명령형이 아니고 어느 것도 명령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이 없는 이유는, 성령 세례란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는 것으로서 구원받는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성령의 내주하심을 받으라는 명령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이미 보장된 약속입니다.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거나 안전하게 보호를 받으라는 명령도 없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1장을 보면, 우리는 이미 인치심을 받았고, 이미 세례를 받았으며, 이미 내주하심을 받았습니다. 결코 명령으로 주어진 적이 없습니다. 명령은 단 하나 뿐입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입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다른 것입니다. 내주하심도, 세례도, 인치심도 아닌 충만함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먼저 말씀드리자면, 성령 충만은 이교도적 활동이나 황홀경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이 동사의 의미를 문자 그대로 설명해드린 다음에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동사는 현재 시제로서 "...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수동태로서 "성령으로 계속해서 충만함을 받고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여기서 "계속 충만함을 받고 있다"는 것은 변함없이 지속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 저는 성령 충만합니다. 이제 됐네요. 평생 이대로 살면 되겠어요"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매 순간, 매 순간 계속해서 충만함을 받고 있어야 합니다. 하루하루, 매일매일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올해 한 번, 내년에 한 번 하는 식의 일회성 경험도 아닙니다. 매 순간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충만한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수동태라는 것은, 여러분이 스스로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여러분을 채운다는 뜻입니다. 그 행위를 받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을 채우시는 것입니다. 현재 시제로서 하나님의 영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고, 성령님이 내주하시고, 구원의 날까지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만일 여러분이 매 순간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지 못한다면 신앙생활에서 실패를 거듭할지도 모릅니다. 성령 충만이란 매 순간 계속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평생 동안 유효한 어떤 이차적인 경험이 아닙니다. 5분 전에 제가 성령 충만했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내일의 성령 충만이 오늘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매 순간, 매 순간 일어나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충만함이라는 것은 잔에 물을 채우거나, 상자에 물건을 넣거나, 용기에 무언가를 부어넣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본래의 의미는 그게 아닙니다. 세 가지 개념으로 설명하겠습니다. 헬라어 ‘플레로오(pleroo)’는 바람이 돛을 가득 채워 부풀게 하고 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뜻입니다. '돛이 바람으로 가득 찼다'라고 표현하듯이, 이것이 바로 바울이 처음에 생각했던 개념입니다, 이끌려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끌려 나아간다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개념입니다. 뭔가에 이끌려 움직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의 능력이 우리 삶의 원동력과 에너지, 추진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에너지나 육신으로 움직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이나 이상을 좇지 않으며, 자신의 의지대로 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바람에 밀려 전진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가시는 길을 따라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성령님께 이끌렸던 것과 매우 비슷합니다.
또한 마치 시냇물에 떠다니는 나뭇가지와 같습니다. 어릴 때 시냇물에 나뭇가지를 던져놓고 저만치 달려가서 떠내려오는 것을 지켜본 적 있으십니까? 우리는 그렇게 나뭇가지처럼 성령님의 이끄심을 받습니다. 바람을 받은 돛단배처럼 나아가는 것이죠. 이것이 첫번째 개념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하루하루, 순간순간, 일에서 일로, 생각에서 생각으로, 말에서 말로, 행동에서 행동으로 성령의 능력에 이끌려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일종의 추진력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우리를 이끄는 그런 추진력 말입니다.
두번째 개념은 ‘스며드는 것’입니다. 플레로오(pleroo)는 때로 무언가가 스며드는 것을 의미하는데, 소금이 아주 좋은 예시입니다. 소금은 침투력이 있습니다. 실제로 소금은 침투력이 좋아서 음식에 충분히 뿌리면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습니다. 또 음식에 소금을 넣으면 맛을 내죠. 전체에 스며들어서 음식 전체에 맛을 더해줍니다. 저는 또 피지(Fizzie)를 예로 들곤 하데, 제가 쓴 <하나님의 뜻 발견하기> 책을 읽으셨다면 아실 겁니다. 피지는 맛이 첨가된 발포 소화제 같은 겁니다. 포도맛, 오렌지맛, 루트비어맛, 체리맛 등이 있죠. 피지 한 알을 물이 담긴 컵에 넣으면, 발포 소화제처럼 ‘쉬익’ 소리가 납니다. 이렇게 피지는 물에 가득 스며듭니다. 포도맛 피지를 넣으면 물 전체가 포도주스가 됩니다. 피지가 물에 맛을 더한 겁니다. 플레로오(pleroo)는 바로 이런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처럼 성령님은 우리의 삶에 맛을 더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성령님의 맛을 내게 하십니다. 누군가 우리 옆에 서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맛이 나서 마치 하나님과 함께하는 느낌이 들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우리 삶에 스며들어서 누군가 우리 곁에 있을 때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삶에 맛을 더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복음서와 비교해 볼 때, 제 생각에 플레로오(pleroo)의 주된 의미는 통제, 완전한 통제를 의미합니다.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스며든다는 의미도 있지만, 통제가 핵심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복음서에서 누군가가 감정에 완전히 사로잡혔다는 것을 표현할 때 본문과 동일한 플레로오(pleroo)를 사용합니다. 요한복음 16장 6절에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고 할 때처럼, 기쁨으로도 상쇄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슬픔에 잠긴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더 잘 이해하실 수 있도록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보통 우리는 삶에서 균형을 맞추며 살아갑니다. 슬픔을 예로 들어볼까요? 저울의 한쪽에는 슬픔이, 다른 쪽에는 행복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살면서 조금 슬프다가도 즐거운 일을 떠올리면서 균형을 맞춥니다. "집에서는 일이 잘 안 풀리니 회사에 가봐야겠다" 하다가 "회사에서도 잘 안 되니 집에 가야겠다" 하면서 말이죠. 우리는 이렇게 균형을 맞추며 삽니다. 슬픈 이야기를 하다가도 "이제 즐거운 이야기를 하자"고 하면서 전환을 하죠.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균형을 맞출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처럼 말이죠. 그때는 저울이 완전히 슬픔 쪽으로 기울어져서, 누가 뭐라고 해도,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슬픔을 덜어낼 수 없습니다. 이렇게 완전히 지배당하는 상태를 표현할 때 바로 이 단어를 씁니다.
반면에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울 이쪽에는 행복이, 저쪽에는 슬픔이 있습니다. 마사 숙모가 돌아가시고 5만 달러를 남겨주셨다고 칩시다. 그러면 슬펐다가도 행복한 쪽으로 기울어지겠죠. "세상이 망해도 상관없어. 5만 달러를 받다니!" 이런 식입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돈이 갑자기 생기면서 행복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게 바로 플레로오, 가득하다의 의미입니다. 완전히 그 감정에 지배당해서 전혀 균형을 잡을 수 없는 겁니다. 주변에서 아무리 슬픈 일이 일어나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그저 행복할 뿐입니다. 인생이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를 지켜주는 것들도 있고 두렵게 만드는 것들도 있어서 그렇게 살아가다가, 어느 날 남편이 승진하고 새 집도 장만하고 아이들도 잘 자라면 우리는 안정감을 느낍니다.
반대로 끔찍한 재앙이 닥치면 겁에 질리게 됩니다. 한밤중에 누군가 현관문 근처를 서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무섭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플레로오'입니다. 균형을 잡을 수 없을 만큼 감정에 휘둘리는 상태입니다. 자제력을 잃고 통제 불능 상태가 됩니다. 우리 생각과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그 무언가에 완전히 지배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같은 원리로 이루어집니다. 우리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살아가죠. 이쪽에는 자아가 있고 저쪽에는 성령님이 계시는데, 우리는 자아에게 조금, 성령님께 조금, 그러다가 또 나를 위해 조금, 이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가 성령님께 완전히 자신을 내어드리면, 자아는 온전히 사라지고 성령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때부터는 모든 것이 성령님의 통제 아래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감정, 모든 의지적 행동, 모든 생각까지 말이죠. 성령 충만이란 바로 이런 겁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성령님께 이끌려 움직이고 성령님이 내 안에 스며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맛을 내는 것입니다. 동시에 성령님의 확고한 통제 아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4장 1절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성령님이 예수님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면서 예수님을 이끄십니다. 성령이 예수님을 이끄셨습니다. 이제 누가복음 4장 1절을 봅시다. 마태복음은 성령에 이끌려 시험을 받으셨다고 했는데, 동일한 사건이 누가복음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자, 여기서 보면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이끄신 조건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성령 충만이었습니다. 이제 성령 충만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시나요? 성령 충만이란 바로 성령님께 이끌림을 받고 성령님의 통제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 1장을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도 예수님이 시험당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마가복음 1장 12절입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여기서 몰아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발로(ekballo)’는 강력한 표현입니다. 말 그대로 성령님이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셨습니다. 광야로 밀어내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성령님의 권능 아래 계셨기 때문에 성령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통제를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모독한 것이 아니라", 누구를 모독했다고 하셨나요? “성령을” 모독했다고 하셨습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이 자신의 삶의 통제권을 성령의 권능에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셨기 때문에 성령에 의해 이끌리셨던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 충만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에 의해 이끌리고, 성령에 의해 움직이며, 성령으로 가득 차고, 성령의 통제를 받는다는 개념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성령님의 통제 아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 한편으로는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님을 소멸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근심하게 한다는 것은 인격이신 성령님을 슬프게 한다는 것이고, 성령님을 소멸한다는 것은 성령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의 인격과 목적 모두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장갑을 예시로 한번 들어볼까요? 여기 장갑이 하나 있는데 제가 "장갑아, 가서 피아노 좀 쳐봐"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냥 가만히 있겠죠. 그런데 제가 그 장갑에 손을 넣고 피아노를 치면 어떻게 됩니까? 난장판이 되겠죠. <젓가락 행진곡> 아시죠? 제가 칠 줄 아는 곡은 이게 다입니다. 한번 연주하고 바로 그만뒀습니다. 대신 저는 야구를 시작했죠. 그런데 아시다시피, 장갑은 손이 들어가면 그냥 따라갈 뿐입니다. 장갑이 갑자기 거룩해져서 "오 손가락이시여, 제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소서"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또 장갑이 "장갑아, 제발 반응 좀 해봐"라며 저항하지도 않죠. 장갑은 그저 손을 따라갈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도 마치 장갑처럼 죽을 때까지 탁자 위에 놓인 채로 끙끙댈 수도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위해 어떤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장갑이 손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듯이, 우리도 성령의 충만한 능력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해내려고 애쓰는 모든 것은 육신의 일입니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지푸라기 같은 것이죠.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효과적으로 일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겁니다. 합당하게 행하고, 사랑으로 행하고, 빛 가운데 행하고, 지혜롭게 행하기 위해서, 또 하나님을 섬기며 지혜롭게 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야 하고, 성령님의 인격이 우리 안에 스며들어야 하며,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끌림을 받고, 성령님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런 상태가 되지 않으면 주님께 쓸모가 없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계시면서도 아무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시간 낭비입니다. 육신으로 행하는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일을 하시고자 하실 때는 항상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사도행전 6장 5절을 보면 특별한 일을 맡길 사람에게 요구되는 자격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도행전 6장 5절, 사도행전 6장 5절입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에 스데반이 택함받은 겁니다. 또 7장 5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성령 충만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을 보게 합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를 세상 체계에서 분리시킵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만 한다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다는 뜻입니다. 스데반은 그저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초월적인 것입니다. 초월적인 현실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세상에서, 환경에서, 현실에서, 시련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위해 사람을 찾으실 때는 성령 충만한 사람을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돌에 맞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다면 결코 그 일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후 사도행전 9장을 보면 하나님께 한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다루기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었죠. 사울은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이었지만 주님께서 사울을 붙잡으셨고 9장 17절에서 한 가지 조건을 주셨습니다. 9장 17절입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이는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체험한 이후의 일입니다.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말하자면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사울아, 네가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육신의 일이 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 충만이란 성령님의 인도하심 아래 한 순간 한 순간을 사는 것입니다. 순종입니다. 순종입니다. 성령님이 나를 채우실 수 있도록 나를 비우는 것입니다. 아시겠나요?
11장 22절을 보겠습니다. 주님은 바나바가 바울을 돕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이 바나바를 택하실 때 몇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22절입니다.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왜 바나바였습니까? 24절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하나님은 또 무엇을 요구하실까요? 13장 9절입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시간이 흐른 후에도 바울은 여전히 성령 충만한 상태입니다. 13장 52절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그 결과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교회를 섬길 사람을 찾으실 때, 선교 사역을 개척할 사람을 찾으실 때, 많은 이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사람을 찾으실 때, 하나님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이끌리며, 예수님의 맛을 내고, 그 능력으로 완전히 통제되는 누군가를 찾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입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이제 충만함의 의미는 알겠는데 그 방법을 모르겠어요. 어떻게 충만해질 수 있을까요?” 빨리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어떻게 성령 충만함을 받을 수 있을까요? 성령 충만이 명령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놀랍게도 사람들은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기도 제목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주님, 성령 충만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가 성령 충만하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도 성령 충만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일종의 장애물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성령 충만하라는 명령을 주실 때 우리에게 그 자원도 주셨습니다. 그 자원은 바로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죄를 고백하는 문제입니다. 좀더 쉬운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의지, 지성, 몸, 시간, 재능, 보물, 모든 것을 성령님의 통제에 맡기는 겁니다. 완전히 항복하는 겁니다. 자아의 죽음입니다.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겁니다. 자신의 자아와 의지를 죽이는 겁니다. 여러분의 지체를 죽이는 겁니다. 여러분을 죽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죽을 때 하나님이 여러분을 채우십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비울 때 하나님이 채우십니다. 하나님이 채우십니다.
성경 말씀으로 예를 들겠습니다. 에베소서 5장을 간략히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그렇다면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19절을 보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게" 됩니다. 20절을 보면 "모든 일에 항상 감사하게" 됩니다. 21절을 보면 서로에게 복종하게 됩니다. 22절을 보면 성령 충만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게 되고, 25절을 보면 성령 충만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게 됩니다. 6장 1절을 보면 성령 충만한 자녀가 부모님께 순종하게 되며, 6장 4절을 보면 성령 충만한 아버지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게" 됩니다. 6장 5절을 보면 성령 충만한 종이 순종하게 되고, 6장 9절을 보면 성령 충만한 주인이 종들을 올바르게 대하게 됩니다.
어떤가요? 놀랍지 않습니까? 성령 충만은 어떤 황홀경이나 특별한 체험이 아닙니다. 대신 찬양과 감사, 복종, 건강한 인간관계를 만들어냅니다. 아무도 갑자기 충격을 받아 정신을 잃지 않습니다. 뒤로 쓰러지지도 않고, 어떤 황홀경을 경험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모든 관계가 올바르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찬양과 감사를 통해 올바르게 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복종을 통해 올바르게 됩니다. 이는 결혼 관계든, 가족 관계든, 직장에서의 관계든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아주 실제적이고 명확합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또 다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골로새서 3장입니다. 골로새서 3장은 에베소서 5장의 평행구절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 중반부를 보겠습니다.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에베소서 5장과 정확히 동일합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입니다. 17절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그리고 나서 다시 에베소서와 동일하게 반복됩니다. 비록 요약된 형태이지만 모든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며,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고, 아버지들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며, 종들은 상전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4장 1절은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라"고 합니다.
동일한 순서로 진행되는 것이 보이십니까? 모든 것이 동일합니다. 신령한 노래를 부르고, 감사하고, 복종하라고 합니다. 아내와 남편, 자녀, 아비, 종과 상전까지 완전히 동일합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는 이 모든 것이 성령 충만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무엇에서 비롯됩니까? 좀 다릅니다. 16절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자, 이제 중요한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령 충만은 곧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보이시나요? 같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동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성령 충만은 정말 신비로운 거예요. 정말 신비롭죠.”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받아들여 그것이 어디에 거하게 하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 마음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해지고 싶다면 구석에 앉아서 하나님께 애원하지 마십시오. 대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자신을 채우십시오. 말씀으로 양육되고 채워질 때, 말씀이 여러분 안에 ‘플루시오스(plousiōs)’ 즉 ‘넘치도록, 풍성하게’ 거할 때, 자연스럽게 말씀의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성령님이십니다. 말씀을 우리 안에 부으면 그 말씀이 우리를 다스립니다. 스펄전의 말처럼 "우리의 피가 성경적이 될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아주 간결한 개념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 충만은 그저 말씀이 내 삶을 이끌어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시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채우십시오. 말씀이 여러분 안에 풍성히 거할 때 성령님께서 그 진리로 인도하시고 방향을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이야기를 더 들려드리겠습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예시입니다.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곁에 있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제가 쓴 하나님의 뜻에 관한 책에서도 이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베드로는 늘 예수님 곁에 있고 싶어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걷다가 멈추실 때면 베드로와 부딪힐 정도였을 겁니다.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든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죠. 예수님이 산에 오르시면 베드로도 산에 올라갔고, 예수님이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는 늘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아시나요? 성경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 곁에 있을 때 세 가지 놀라운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행했고, 기적 같은 말을 했고, 기적 같은 용기를 발휘했습니다.
첫번째입니다. 베드로가 처음 행했던 기적을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배 안에 있었습니다. 정말 긴장되는 순간이었죠. 폭풍이 몰아치는 갈릴리 바다 한가운데서 제자들은 예수님 없이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멀리서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내가 여기 있고 주님이 저기 계시다니, 이래선 안 돼. 저 간격을 좁혀야 해.” 그래서 예수님께 가기로 한 거죠. 평생 어부로 살면서 갈릴리 바다에서 살았지만, 물 위를 걸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물에 발을 디디면 늘 가라앉기만 했었죠. 그걸 알면서도 배에서 뛰어내려서 물 위로 걸어갔습니다. 조금 가다가 너털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해서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도 몰랐던 거죠. 그저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가고 싶었던 겁니다. 베드로는 결국 예수님을 만났고, 무서워하다가 물에 빠지자 주님이 손을 내밀어 건져주셨습니다. 함께 배로 걸어가면서 베드로는 꽤나 뿌듯했을 것 같습니다. "어때, 봤지?"하는 마음이었겠죠.
어떤 저자는 베드로와 예수님이 단지 모래톱 위를 걸었을 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한심한 주장입니다. 요나를 삼킨 거대한 물고기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단지 배 뒤에 묶여있던 구명정 이름일 뿐이라고 했죠. 물론 제가 궁금했던 건 이겁니다. 사람을 토해내는 구명정은 또 어디서 들었을까요? 뭐 이건 그냥 곁다리 이야깁니다.
어쨌든 베드로와 예수님이 물 위를 걸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곁에 있을 때는 기적같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혼자서는 물 위를 걸을 수 없었지만 예수님 곁에 있을 때는 가능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볼 수 있는 장면은 제자들이 모여있을 때입니다. 마태복음 16장입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또 질문하십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는 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분명 베드로는 '내가 어떻게 이런 말을 했지?'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보십시오. 베드로의 입은 말하는 도구였던 겁니다. 그 장 후반부에서는 사탄이 베드로의 입을 이용했습니다. 기억나시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베드로의 입은 도구였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이 나온 겁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내 아버지께서 방금 잠시 네 입을 통해 말씀하신 거란다.” 그러니 베드로가 예수님 곁에 있고 싶어했던 것도 당연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기적도 행할 수 있었고, 놀라운 고백도 할 수 있었으니까요.
세번째입니다. 베드로는 기적과 같은 용기를 보여줬습니다. 동산에서 군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을 때의 일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시자 로마 군대가 도미노처럼 한꺼번에 쓰러졌습니다. 베드로는 속으로 '이거 쉽겠는데, 예수님 한마디에 다들 쓰러지다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곁에 서 있던 베드로는 점점 더 화가 나서 결국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칼을 빼서 맨 앞에 있는 사람부터 친 겁니다. 안토니우스 요새에서 온 500명 정도를 모조리 해치울 작정이었습니다. 말고의 귀를 베어버렸는데, 사실 머리를 노린 것이었지만 말고가 피했을 겁니다. 단순히 귀만 자르려고 한 게 아니었죠. 첫번째 사람을 시작으로 군인들을 차례차례 쓰러뜨리려 했던 겁니다. 도대체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났을까요? 하지만 베드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예수님이 다시 한 번 말씀하실 것이고, 그러면 모두가 쓰러질 것이니 걱정할 게 없다는 걸 말입니다.
보십시오. 베드로는 예수님 곁에 있을 때면 기적을 행하고, 기적을 말하고, 기적적인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늘 예수님 곁에 있고 싶어했던 것도 당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라고 대답한 것도 당연했죠. 그런데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예수님과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에서 재판을 받고 계시는데, 베드로는 밖에서 손을 씻고, 아니 손을 녹이고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베드로가 세 번이나, 어떻게 했다고 나오나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베드로는 예수님과 떨어지는 순간 실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겨우 30미터 떨어졌을 뿐인데 겁쟁이가 된 겁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완전히 끝난 걸까요? 30미터 떨어져 있을 때도 겁쟁이였는데, 이제는 어떻겠습니까? 주님이 저 멀리 하늘 너머에 계신데, 이제 베드로를 포기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했는지 아시나요? 오순절 날 베드로가 일어나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정말 위대한 설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베드로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 겁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가득했습니다.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그렇게 3천 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보이시나요? 다시 한 번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입만 열면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예배드리러 가는 길에 한 거지를 만났습니다. 베드로가 그를 보며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러자 놀랍게도 그 사람이 벌떡 일어나 뛰고 춤추며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베드로는 기적적인 말씀만 전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기적도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이 산헤드린 공회 앞으로 끌고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그러자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결국 그들은 베드로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고, 베드로는 돌아가서 무리들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베드로와 그 무리들이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기적을 행하고, 기적 같은 말씀을 선포하고, 기적과도 같은 용기를 보여줬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도 베드로는 여전히 기적을 행하고, 놀라운 말씀을 전하며, 대단한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베드로가 오순절 설교를 하려고 일어서기 전에, 사도행전 2장 4절을 보면 "그들이 모두 무엇으로 충만했다"고 합니까? "성령으로" 충만했다고 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령 충만은 누구와 함께 서있는 것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을 이끌어가시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신비로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채워서 그리스도의 진리가 우리의 생각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며, 그럴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하고 말하고 살아가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다음주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님께서 부르기 원하시는 이들을 기도실과 상담실로 보내 주옵소서. 오늘 밤 우리를 이끌어 주셔서 특별한 방법으로 주님을 다시 만나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앞에 순종할 때마다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는 성령님께 감사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바라게 하시고, 아침부터 밤까지 주님을 생각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섭취하여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할 수 있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주님의 목적과 영광에 부합한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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