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리를 설교할 때마다 따르는 위험이 하나 있습니다. 설교가 너무 길 수 있다는 거죠. 또 여러분이 마치 소방 호스에서 최대 강도로 뿜어져 나오는 물을 마시는 느낌이 들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제 열정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위해 살고, 진리를 선포합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만큼 중요한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 저녁부터 성경에 관한 쟁점을 살펴보기 시작한 것이죠. 앞으로 몇 주가 걸릴 지는 모르겠지만, 성경의 위대한 교리들을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성경에 세 번 나오는 익숙한 구절을 살펴보면서 시작하겠습니다. 신명기 8장, 마태복음 4장, 그리고 누가복음 4장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여기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떤 삶을 말하고 있는 걸까요? 바로 모든 삶입니다. 영적인 삶뿐만 아니라 현세의 육체적인 삶을 포함한 모든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것, 삶의 모든 인식과 태도와 행동을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육체적 삶과 그 모든 측면을 지배하는 영적 삶의 양식이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 말씀 뿐이라는 것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신자에게 유일한 영혼의 양식은 오직 성경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1편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편 19편은 성경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이런 가르침도 줍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우리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이는 여호수아 1장 8절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모든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만이 우리 영혼의 참된 양식입니다.
시편 40편 8절입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왜일까요?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다는 것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율법에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119편에는 176개의 절이 있는데 그 중에서 몇 절만 보겠습니다. 시편 119편은 시편 1편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시편 1편과 비슷하게 시작합니다.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참으로 그들은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주께서 명령하사 주의 법도를 잘 지키게 하셨나이다 내 길을 굳게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이것은 갈망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서 나오는 외침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죠. 시편 119편 15절입니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길들에 주의하며.” 16절입니다. “주의 율례들을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27절입니다. “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33절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35절입니다.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40절입니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72절로 넘어가 보면, 하나님 자녀의 마음에 있는 갈망이 비슷하게 표현됩니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97절입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113절입니다.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131절입니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161절부터 165절입니다. “고관들이 거짓으로 나를 핍박하오나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나는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하고 주의 율법을 사랑하나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167절입니다. “내 영혼이 주의 증거들을 지켰사오며 내가 이를 지극히 사랑하나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 말씀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완벽한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요? 아닙니다. 176편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하나님 말씀을 기억하고, 사랑하고, 고대하고, 갈망하지만, 항상 지키는 건 아니라고 합니다. 진정한 신자는 하나님 말씀을 사랑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말씀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은 신약성경에서 이 점을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8장 31절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너희의 자리와 안식처와 거처를 내 말에서 찾으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십니다.
진정한 제자, 마데테스 알레도스, 참 제자는 말씀 안에 거하고 말씀 안에서 삽니다. 말씀만이 유일한 영적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진정한 제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기쁨으로 마음을 다해 순종합니다. 요한일서 5장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킬 때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데살로니가후서와 비교해서 보겠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0절이 알려주는 바는 멸망하는 자들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구원받는 것은 진리를 사랑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진리를 사랑합니다. 따라서 정죄를 받는 이유는 진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1절부터 3절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갓난 아기들은 다양한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아기가 원하는 것이라곤 오직 젖 뿐입니다. 다른 음식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젖을 원할 뿐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죠.
참된 신자라면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자신을 살아있게 하고 강건하게 하며, 복과 기쁨과 능력과 힘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이 어려운 말씀을 하시자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예수님은 남아있는 제자들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남은 제자들을 대표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안에서 생명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영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은 말씀을 사랑합니다. 말씀을 양식으로 삼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갈망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진리로만 만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대한 무관심은 중생의 표지가 아닙니다. 성경에 대한 무관심은 구원의 표지가 아닙니다. 성경에 대한 무관심은 영적 죽음의 표지입니다. 저는 이 세대를 포함한 모든 세대에서 하나님의 참된 교회에 속한 사람들,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진리를 갈망한다고 믿습니다. 이들은 말씀을 양식으로 삼습니다. 말씀을 공급받고 말씀이 선포되기를 원합니다. 누군가가 성경 말씀 안에 담긴 풍성하고 깊은 뜻을 설명해 주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항상 그렇게 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일, 성경 본문을 원어로 열심히 연구하는 일, 성경 66권이 스스로 본문을 설명한다는 ‘성경의 유비’를 따라가는 일, 성경에 담긴 보물을 캐내기 위해 열심을 내는 일은 소위 기독교 유명 인사들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제임스 패커(J. I. Packer)는 수년 전에 복음주의의 특징을 설명했는데,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패커가 이 글을 쓴 이후로 수십 년이 지났지만 크게 달라진 게 없습니다. 리처드 백스터의 <기독교 생활 지침> 서문에서, 패커는 복음주의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는 자기중심적이고 우스꽝스럽고 단순하며 퇴보적이고 반은 마법 주문과 같은 헛소리로 가득한 일련의 방법론이다. 온 세계는 기독교 방송을 보거나 자칭 복음주의 공동체를 바라볼 때 이러한 광경을 본다.” 성공회 신학자가 내놓은 그야말로 신랄한 비판입니다.
패커는 계속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의 방법론, 즉 기독교적인 방식으로 좋은 가정을 꾸리고 훌륭한 부부관계를 이루며 경제적 성공을 거두는 방법, 슬픔과 삶의 여정, 위기, 두려움, 답답한 관계 등에 대처하는 방법, 이러한 모든 방법들은 따라야 할 공식, 즉 각종 수치를 덧입힌 일련의 행동 방식을 제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이를 청교도 리처드 백스터의 강력한 책과 비교합니다. 이 책은 성경을 그리스도인의 삶에 적용하는 내용으로 백만 단어가 훨씬 넘습니다. “이 백스터의 작품에는 고도의 지성과 성경을 기반으로 한 신학적 지혜가 명료하게 담겨 있어 우리의 지성을 밝힌다.”
이처럼 지성을 밝히는 명료한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 오늘날 사람들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고도로 정확하고 지성적이고 도전적인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 신학적으로 풍성하고 건전하고 통합적이며 분명한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은 어디로 갑니까? R.C. 스프로울은 <테이블톡>지 최근 호에 실린 기사에서, 우리 문화가 ‘자랑스러운 평범함’에 빠져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평범하고 그 평범함을 자랑스러워합니다. 물론 과학기술이나 여러 연구 분야에서 열심히 연구하는 학자들이 여전히 있긴 합니다. 커다란 임무를 가지고 문제에 매진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길고 지루한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점점 예외적인 사람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교육 시스템은 예전만큼 이런 사람들을 많이 배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문화가 교육을 재정의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문화는 빠른 것, 저렴한 것, 쓰레기 음악, 쓰레기 예술, 쓰레기 문학, 쓰레기 사고에 익숙합니다. 너무도 쉽게 만족하고 너무도 쉽게 받아들입니다. 탁월함, 진리, 아름다움은 인간의 3대 덕목으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재미, 멋, 귀여움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이처럼 평범한 것들이 넘쳐나는 이유는 우리가 평범함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두 팔 벌려 평범함을 받아들인 우리는 이제 평범함을 갈망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문화를 교회가 수용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여러분이 평범함을 원하니 평범함을 드리겠습니다. 평범함을 드릴게요. 평범한 복음주의를 드릴게요. 초월성을 버릴게요. 성경적인 것도 버릴게요. 신학적인 것도 버릴게요. 성경에서 심오한 깊이를 요구하는 진리도 없애고, 평범함에 굶주린 대중들에게 평범함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문화를 정의하고 있는 평범함과 천박함을 수용하겠습니다.’ 그렇게 우리에게는 심오한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만 남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문화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도 있게 된 겁니다.
이제 목회자들의 관심은 재미있고 멋지고 괜찮은 것에 있습니다. 재치와 독창성, 스타일에 전념한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그 영광스러운 진리의 깊이를 선포하라는 엄격한 요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문화가 원하는 것이 곧 문화가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타락한 걸까요? 제임스 패커(J. I. Packer)는 서문을 많이 썼는데, 그 중에서 <청교도 신학>의 서문을 보겠습니다.
패커는 이렇게 말합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청교도의 최대 강점이었던 것이 오늘날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의 최대 약점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청교도에게는 뛰어난 지적 능력이 있었다. 냉철한 학문으로 훈련된 정신적 자질이 하나님에 대한 불타는 열정, 인간의 마음에 대한 세밀한 이해와 연결되어 있었다. 청교도의 모든 작품에는 이처럼 특별하게 결합된 은사와 은혜가 나타난다. 청교도들이 질서와 규율, 깊이, 철저함을 추구했던 반면, 우리에게는 대충 되는 대로 하면서 불안하고 조급한 성미밖에 없다. 자극적이고 새롭고 재미있는 것만을 갈망할 뿐이다. 견실한 연구, 겸손한 자기 성찰, 훈련, 묵상, 연구에 따라붙는 필연적인 노력은 던져버린지 오래다.”
“또한 청교도주의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에 두었던 반면, 우리의 사고는 마치 우리가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우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패커는 또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전도할 때 율법 없는 복음과 회개 없는 믿음을 전하며, 구원이라는 선물은 강조하지만 제자로서 치러야 할 대가는 가볍게 넘긴다. 그토록 많은 소위 회심자들이 쉽게 떨어져 나가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계속 읽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르치면서 이를 실천하는 믿음이 아닌 황홀한 감정을 추구하는 길로, 이성적 의로움이 아닌 초자연적 개입을 추구하는 길로 묘사하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대해 기쁨, 화평, 행복, 만족, 안식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로마서 7장에 담긴 거룩한 괴로움, 시편 73편의 믿음의 싸움,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책임과 섭리적 징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태평하고 외향적인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유쾌함이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삶과 동일시되고 있다. 그리하여 교회에서 유쾌하고 외향적인 사람들은 육신적인 감정 상태에 안주하도록 격려받는 반면, 다소 덜 낙천적인 기질의 경건한 영혼들은 앞서 언급된 방식으로 들떠있을 수 없어서 거의 미칠 지경에 이르고 있다.”
우리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복음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다가간다는 이유로 문화가 원하는 평범함을 제공하면서 하나님 말씀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거나, 육신적인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가장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면서 육신적이 된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로 인해서 하나님 말씀을 제쳐두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사실 저는 이런 추세를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봅니다.
몇 주 전에 로마서 1장을 다루면서 말씀드린 바 있지만,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한 가지 방법은 사람들이 죄를 짓기로 선택하도록 내버려 두시고 그 선택의 결과대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을 보면 “내버려 두사”라는 표현이 세 번 나옵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원하는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기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제 생각에 이러한 유기의 한 형태는,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원하지 않으면 그 거부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길로 가도록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훌륭한 예시를 하나 보겠습니다. 구약성경 아모스 8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아모스는 원래 드고아 출신의 보잘것없는 목자였지만, 하나님의 부르심과 놀라운 계시를 통해서 위대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아모스 8장 11절에서 아모스는 이스라엘에게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적절한 말씀입니다. 말씀의 기근입니다. 사람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한다고 합니다. 말씀하셔도 듣기를 거부한 백성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800년 전, 북왕국 이스라엘은 자신감에 넘쳐 우쭐대며 자만했습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죠. 결국 도덕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아모스의 예언 전체를 읽어보십시오. 전부 나와 있습니다. 도덕은 무너지고 정직은 사라졌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학대를 당했고 상류층은 타락했습니다. 하지만 돈은 넘쳤고 번영을 이뤘습니다.
비록 예배를 드리고는 있었지만 하나님이 이 예배를 어떻게 생각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5장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예배를 미워한다고 하십니다. 너희의 성회들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예배를 미워한다고 하십니다. 노래와 음악을 듣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제물도 받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모든 것이 싫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자기들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번영이 이스라엘을 속였던 겁니다. 모든 것이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날마다 죄를 지었고 죄악과 불법이 만연했지만 표면적으로는 종교의 형식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자기들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폭탄을 떨어뜨리시기 전까지는 말이죠. 그 폭탄에는 이름이 있었는데 바로 아모스였습니다. 아모스는 사마리아로 돌진해 들어와서는 멸망을 예언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심판하실 거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강력하면서도 엄중하게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2장 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3장 1절부터 2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에 대하여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모든 족속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너희가 받은 특권으로 인해 더 강력한 심판이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4장 12절도 동일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대면할 준비를 하라는 겁니다.
아모스 전체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심판은 주전 722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파괴되고 포로로 끌려가면서 성취되었습니다. 잡혀간 백성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북왕국 세대가 완전히 사라진 겁니다. 5장 27절에서 아모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이라 불리우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다시 8장을 보겠습니다.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이 얼마나 큰 비극인가요? 하지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너희가 듣지 않았으니 나도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이지만 지금 다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아모스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이 듣지 않으려고 한다면 진리를 찾을 수 없을 때가 온다는 겁니다. 이 나라의 역사를 보십시오. 건국 초기에 위대한 복음 선포의 시대가 있었고, 대각성운동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현대에 이를 때까지도 강단에서 일관성 있게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아예 믿지 않았고 하나님 나라 안에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말씀을 공격하고 비난했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말이죠.
듣지 않으려고 했던 사람들은 이제 주님의 말씀을 쉽게 접할 수 없을 겁니다. 지금까지는 원하면 들을 수 있었지만,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가 오면 그럴 수 없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제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 심판하실지 정확히 알 수도 없지만, 이것만은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이제 불신자들은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대변자인지 알아내기가 거의 불가능해졌다는 겁니다. 불신자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점점 더 희귀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조차 불신자들을 불쾌하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좋지 않은 전략이라는 이유로 말씀 전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는 모든 것을 원하지만 성경만은 예외입니다. 교회도 이러한 시류에 발맞춰 성경을 제외한 모든 것을 제공하는 것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경의 권위와 우선순위를 고수하는 사람들, 건전한 교리의 권위와 우선순위를 고수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계시를 진지하고 성실하게 연구하고 설교하는 사람들은 세상과 문화, 심지어는 교회로부터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신자들, 참된 신자들은 진리를 공급해줄 사람을 갈망하면서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오늘 저녁에 다루려는 질문이죠. 우리는 어떻게 성경을 믿게 된 걸까요? 우리는 왜 성경을 믿을까요?
우리는 왜 주일 아침과 저녁마다 이곳에 모이는 걸까요? 오전에는 교제 모임을 갖고, 주중에는 성경 공부로 모입니다. 로고스 수업을 듣기도 하고, 성경을 연구하기 위해 마스터스 대학에 가거나 마스터스 신학교에 가기도 합니다. 서점에 가서 수십만 권의 책을 사기도 하고, 테이프와 CD를 사서 계속해서 하나님 말씀을 흡수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해서 이런 확신을 갖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똑똑해서 그런 걸까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지적 엘리트라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누군가 우리에게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심오하고 피할 수 없는 논거를 제시해서 그런 걸까요? 우리가 성경은 믿을 만하다는 합리적인 증거를 확인했기 때문일까요? 가장 지적이고 가장 명확하게 사고하는 이성적인 사람들이라서 그런 걸까요? 성경의 진실성에 대해 가장 명확하고 정확한 최고의 설명을 들어서 그런 걸까요? 그래서 우리가 여기 있는 걸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중에 지혜로운 자나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천한 자들이고 아무것도 아닌 자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엘리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왜 이 교회에 있는 걸까요? 온갖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나는 다른 교회에 있지 않고 말이죠. 애초에 여러분은 왜 교회에 속하게 된 걸까요? 왜 여러분은 성경과 연구용 성경, 주석, 묵상집, 큐티집, 성경에 관한 책들을 구입하십니까? 왜입니까? 어디서 이 모든 확신을 얻으셨나요? 여러분은 왜 성경을 연구하고 싶어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중요한 업적을 남긴 분들의 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마틴 루터의 말입니다. “성경은 단순히 연구한다고 해서, 언어에 재능이 있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에 의지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 또 다른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도에게서 직접 복음을 들었다 할지라도 하늘 아버지께서 가르치시지 않으면 행할 수 없다.”
칼빈도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새롭게 해 주셔야, 거듭나게 하셔야 말씀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이죠. 또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의 증거는 이성을 뛰어넘는다.”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성령의 증거는 이성을 뛰어넘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성령의 내적 증거로 인치심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스스로를 확증하므로 증명이나 논증에 의지하지 않으며, 우리가 가져야 마땅한 완전한 확신은 성령의 증거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심오하면서도 정확한 말입니다.
칼빈은 또 이렇게 썼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은 말씀이 주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는 것을 대담하고 담대하게 증언했다. 그 동일한 성령께서 이제 우리 마음에 증거하시는 것은 우리를 가르치시기 위해 선지자들을 종으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 하나님의 위엄이 드러나 있는데도 성경의 저자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많다고 놀랄 필요가 없다.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은 자들, 곧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마땅히 모든 이에게 보여야 할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우리를 엘리트라고 생각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누구와 같이 되어야 하나요? 바로 어린아이입니다. 우리는 귀족도 아니고 권력자도 아니고 박식한 엘리트도 아닙니다. 우리는 현명하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못합니다. 현명함, 지혜, 그런 것들이 성경에 대한 확신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칼빈이 말했듯이 이성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성보다 뛰어난 성령의 증거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구원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어진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확신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주어진 이 믿음의 확신이 이성의 시험을 견딜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확신의 원천은 이성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주어지는 성령의 내적 증거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십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참되고 신뢰할 만하다고 증언하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4절부터 5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설교와 계시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사람들이 복음 설교를 들을 때 일부 사람들만이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을 갖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해하도록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4절과 5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이런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여기 한 설교자가 있습니다. 그의 설교는 평이하고 직설적이면서 간결했고,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을 전했습니다. 매우 명확하고 직설적이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문화적 방식으로 설교를 다듬지 않았습니다.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않고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했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내 설교는 직설적이고 간결하지만 엄청난 영향력이 있는데, 내 언변이 뛰어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성령과 그 능력이 위대하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의 믿음이, 진리에 대한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고,”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설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하나님의 모든 계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객관적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성의 시험을 통과합니다. 면밀한 조사와 검토, 역사적 검증을 통과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온전히 신뢰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은 성령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수년 전에 휘티어 대학에서 강연을 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3일 동안 저녁 강연에서 성경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달라고 요청해왔죠. 당시 저는 꽤 젊었고 아주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성경이 참되다고 믿기 때문에 그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자료를 만들었습니다. 성경은 그 통일성 때문에 참됩니다. 성경에는 모순이 없습니다. 성경은 그 과학적 정확성 때문에 참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 땅을 매다셨다고 말합니다. 상당히 중요한 진술이죠. 또한 성경은 땅이 변하여 진흙에 인친 것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고대 사람들이 원통 인장을 부드러운 점토에 굴려서 서명했던 것처럼 말이죠.
성경은 우주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진행되는 태양의 궤도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이사야서에는 물의 전체적인 순환 과정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여러 과학적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과학이 다소 원시적이었던 것을 생각해 볼 때, 이토록 높은 과학적 정확성은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성경의 역사적 정확성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를 비롯해서 각종 증거들을 가지고 설명했습니다. 모든 세부사항까지도 말이죠.
저는 기적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수십만 명이 목격한 기적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기적이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일들, 기적적인 사건들, 기적적인 본성, 우리 주님과 성경을 기록한 사도들과 동역자들의 삶에 나타난 기적적인 증거들 말이죠. 저는 이 모든 것들을 설명했습니다. 심지어 누구도 감히 꾸며낼 수 없을 만큼 초월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이 모든 증거들을 정성스럽게 제시했고, 솔직히 말해서 압도적인 증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아는 바로는 전체 학생 중에서 단 한 명도 설득되지 않았습니다.
강연장을 나서면서 저는 이성 이상의 무언가가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2장 14절 말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함께 살펴볼까요?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서론에 불과합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입니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이것이 바로 그 답입니다.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증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은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믿지 않는 이유는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할 수 없다’에는 심오한 현실이 담겨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 믿을 수 없는 이유는 영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능력이 하나도 없습니다. 게다가 고린도후서 4장을 보면 이 영적 무능력을 악화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우리가 복음을 전했지만 모든 사람이 믿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만일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었다고 합니다.
지옥으로 향하는 이들에게는 복음이 가리어져 있습니다. 어떤 경우인가요? 4절입니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믿지 않는 이유는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이유는 영이 아니라 육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신, 그러니까 사탄이 마음을 혼미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을 보겠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얼마나 깊은 어둠 속에 있는지를 예수님이 말씀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5절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육에 속해 있는 상황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탄이 마음을 혼미하게 하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답은 26절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하시며 답을 제시하십니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이것이 유일한 답입니다. 다른 답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성으로 복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꼭대기에, 정점에 도달한 이성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똑똑했던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이 계셔야만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성경의 하나님이 바로 그 하나님이라는 합리적인 추론을 해내지 못했을까요?
학자들이 성경 연구에 노력을 쏟아 부으면서 역사에 담긴 예수님을 추적하고, 그리스도의 삶을 연구하고, 구약을 철저히 연구한다면 어떨까요? 지금까지 수십만 명, 수백만 명의 구약 학자들과 랍비들이 성경을 읽었습니다. 대학과 신학교의 종교학과에는 최고 수준의 지성을 가진 온갖 종류의 신약학자들과 교수들이 있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육에 속한 사람이 믿지 못하는 이유는 진리가 전혀 다른 차원에 있기 때문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사탄이 마음을 혼미하게 하기 때문에 더 깊은 어둠에 빠집니다. 악의 세력에 이끌리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진리로부터 도망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진리를 드러내는 것을 제한하십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드러내십니다. 열두 제자를 택하시는 장면에서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열두 제자 중에는 유명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랍비도, 선생도, 설교자도, 회당 지도자도, 바리새인도, 사두개인도, 서기관도 아니었습니다.
학자나 엘리트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제자들 중 7명은 어부로서 육체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명은 세리였는데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들을 택하셨을까요? 그 답은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 다음 절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하나님이 계시하신 진리를 믿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일하셔야만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지혜, 의로움, 거룩함, 구원함, 이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기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신 걸까요? 31절입니다.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인간의 이성으로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불신자에게 온갖 종류의 증거와 합리적인 논거를 제시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물론 진리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사람들을 깨닫게 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성경의 진실성을 제시하고 싶다면… 저는 이 강단에 설 때마다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저는 이곳에 올라와서 성경이 참임을 보여주는 합리적인 증거를 전하지 않습니다. 그저 성경을 펼칠 뿐입니다. 성경이 그 어떤 무기보다도 더 날카롭고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그 자체로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앞에서 마태복음 11장을 이미 살펴봤죠. 이 엄청난 구절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드리고 싶습니다. 25절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왜 그렇습니까?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구절을 보겠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중요한 부분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만이 복음을 믿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게 됩니다. 오직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고,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내십니다. 매우 선택적입니다. 그런데 마치 모두를 초대하고 계신 것 같은 말씀도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비밀이기에 우리는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초대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나님의 주권과 초대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겁니다.
이제 마태복음 13장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다음주를 위해 본론이 될 본문은 남겨 두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 서론 부분의 11절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앞에 보면 제자들이 질문을 했습니다.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비유는 어떤 대상들 간에 유사점을 찾아서 예시를 드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의미를 설명하지 않으면 수수께끼가 되고 맙니다. “그들에게 왜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왜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요? 라고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제가 정말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에게 허락된 특권이 느껴지나요? 그 특권이 느껴지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의 직접적인 결과로 여기에 앉아계신 겁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에 자신의 진리를 여러분에게 드러내기로 정하셨습니다. 13절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말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예수님이 이사야 6장을 인용하신 겁니다.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우리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온갖 종류의 사람이, 랍비, 종교에 속한 사람, 학자, 학생이 뭔가를 알아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철학을 살펴보고 있고, 종교를 해석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보잘것 없고 비천한 사람들이지만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11절이 설명하는 것처럼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는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성경을 믿습니까? 우리에게 믿으라고 주셨기 때문입니다.
수년 전부터 제게 큰 영향을 주고 있는 변증가가 있는데, 바로 코넬리우스 반틸입니다. 아직도 가끔씩 반틸의 저서를 읽을 때마다 감탄하곤 합니다. 반틸은 위대한 전제주의적 기독교 변증가입니다. 반틸의 전제는 성경이 참되다는 것이었습니다. 반틸은 저서 <조직신학 서론> 5권 130쪽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죄인에게 필요한 것이 오직 참된 정보라고 말하곤 한다. 그렇지 않다. 참된 해석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 죄는 잘못된 정보일 뿐만 아니라 영혼을 타락시키는 힘이기 때문이다.” 죄인에게 정보를 제공하거나 해석해 주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만 한답니다.
반틸은 계속 말합니다. “기독교인은 성경을 통해 깨닫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는다면, 자신 안에 있는 죄로 인해 자연을 잘못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러분도 모두 알고 계시죠.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변증학은 궁극적인 권위에 대한 갈등, 즉 우리의 전제나 최종 기준에 대한 갈등을 수반한다.” 무슨 말인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인간에게 이성적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거나, 그러한 능력이 없다고 믿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인간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면, 여러분은 비성경적 인간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그러한 능력이 없다고 믿는다면, 여러분은 그러한 능력이 합리적 지성에 주어지는 증거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에 있다는 점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많은 사역자들이 추구하는 바는 기발함과 합리성, 기타 조종하는 힘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시도에 불과합니다. 영적 죽음에서 깨어나고, 영적 무지에서 벗어나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나 스스로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의 마음 안에 있다고 여기고, 복음을 쉽게 만들면 사람들을 믿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말도 안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소위 복음주의를 이끄는 원동력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것,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를 대적하는 것, 복음을 대적하는 것은 성경의 진실성이나 진리에 관한 정당한 지성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로 가득한 영혼이 하나님을 반역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가장 이성적인 수준에 있다 하더라도 영적 지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최고 권위가 없습니다. 죄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이성이 구원의 결정적 요인이라고 생각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에 의하면 최고 권위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이 참인지를 결정합니다. 죄인들은 수세기 동안 성경에 자신들의 이성을 적용하여 저주받을 온갖 종류의 이단을 만들어 냈습니다. 반틸은 이렇게 썼습니다. “모든 사람은 믿음으로 받아들인 입장을 바탕으로 사고한다. 그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거나 자신과 자신의 이성을 믿는 믿음 둘 중의 하나이다.”
저는 인간 이성에 제 믿음을 두지 않을 것이기에 인간 이성을 조종하는 설교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저 하나님 말씀을 선포할 뿐입니다. 제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말씀에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압도당해야만 합니다. 성경 이외의 것을 설교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죄인은 진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 진리야말로 죄인에게 필요한 정보입니다. 이 진리를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죄인에게 필요한 해석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다시 태어나지만, 죄인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생명을 달라고,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을 벗겨 달라고, 눈멀게 하는 원수를 물리쳐 달라고, 하나님이 숨기고 계신 것들을 보여주시고 빛으로 인도해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자신을 던지고 두려워하는 영혼의 깊은 곳에서부터 이렇게 울부짖어야 합니다. “하나님,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하소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뭐라 말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 감사드릴 때, 우리 마음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셔서 하나님을 계시해 주셨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예수님을 사랑하도록, 말씀을 사랑하도록, 그리고 서로를 사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이성적 능력이 아닌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능력을 증거합니다. 우리는 진실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열렸고, 이제 우리는 시편 기자와 같이 고백합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합니다. 주의 율법을 사랑합니다. 주의 교훈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주님의 진리에 주리고 목마릅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유일한 양식입니다.
하나님, 이 나라와 온 세계에 있는 주님의 백성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근에 직면해 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참된 백성들의 주린 영혼을 채워줄 수 있는 교사와 설교자, 저술가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어리석고 평범한 것에 몰두해 있는 이 사회가 깊고 진실한 것을 갈망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교회를 주님의 은혜로 변화시켜 주옵시고, 다시 말씀에 담긴 충만함과 풍성함을 선포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모든 영광을 주께 돌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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