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달 전인 지난 여름에 마가복음 2장 후반부터 3장 초반까지를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기준으로 볼 때 안식일을 어기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대면했을 때 예수님은 두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감당하기 힘든 짐으로 바꾸어 버렸지만, 안식일은 사람이 짊어져야 할 짐이 아니라 누려야 할 기쁨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말씀은 좀 더 충격적입니다.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안식일에 대한 주권을 선포하신 겁니다.
안식일은 하나님 백성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요? 잠시 출애굽기 20장을 보겠습니다. 십계명, 즉 열 가지 계명이 나오죠. 열 가지 계명 중간에 네 번째 계명이 있습니다. 8절부터 읽겠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다른 아홉 개의 계명에 영원한 구속력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다른 신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결코 우상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경배해야 합니다. 또 결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살인하거나 간음하거나 도둑질하거나 거짓말하거나 탐내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도덕적 명령, 도덕적 규범입니다. 네 번째 계명이자 안식일에 관한 계명인 8절에서 11절을 제외하고 말이죠. 그래서 이런 질문이 자주 제기됩니다. 다른 모든 계명이 영구적인 계명이라면 이 계명도 영구적이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안식일이 영구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엄격한 안식일주의자(strict sabbatarians)라고 부를 수 있죠. 이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Seventh Day Adventists)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이단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엘렌 G. 화이트의 글이 하나님께 영감을 받아 쓰여진 것으로서 성경과 동일한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네 번째 계명에 충실하다고 주장합니다.
두 번째 부류는 제칠일침례교회(Seventh Day Baptists)입니다. 비교적 교세가 작죠. 이들 역시 네 번째 계명에 영구한 구속력이 있다고 해석합니다. 그렇게까지 엄격하지는 않지만 기독교 안식일주의자(Christian sabbatarians) 정도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기독교인으로서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이제는 안식일이 일곱째 날이 아닌 첫째 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계명에 나오는 안식일이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이 견해에 동의합니다. 많은 청교도들도 이렇게 생각했죠. 실제로 1689년 침례교 신앙고백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기독교 안식일 조항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새로운 안식일로 여기는 동시에 옛 안식일에 적용되었던 규정과 제한을 따라야 한다는 내용이죠.
오늘 저녁에 우리 앞에 놓인 질문은 무엇이 옳은가 하는 것입니다. 토요일, 즉 옛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맞을까요, 아니면 일요일을 일종의 새로운 대체 안식일로서 다른 모든 날들과 구별된 거룩한 날로 지키는 것이 맞을까요?
그 답을 찾으려면 창세기 2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창세기 2장으로 가보겠습니다. 2장은 창조가 끝났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늘과 땅에 만물이 조성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3절에 나오는 “거룩하게 하셨으니”라는 표현을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거룩’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곳입니다. 이 단어의 어근에는 ‘분리하다’라는 의미가 있는데, 이를 수직적 개념으로 바꾸면 ‘높이다’라는 의미도 됩니다. 높이 들어 올려서 분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처음으로 뭔가를 높임으로써 분리하는 개념이 나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 일곱째 날을 다른 모든 날들보다 높은 날, 높이 들어올린 날로 지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날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세 가지 이유로 그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 이유는 본문을 구성하는 세 가지 동사와 연결됩니다.
첫째, 이 일곱째 날이 특별한 이유는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동사입니다. 모든 창조 사역이 완성되었습니다. 이 창조 사역은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 24시간을 하루로 하는 6일 동안 행하셨습니다. 여섯째 날이 끝난 이후로는 더 이상의 창조 사역이 없었습니다. 단,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간혹 읽게 되는 기적과 주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련의 기적은 예외입니다. 그 기적을 통해서 타락한 창조 세계 가운데서 온전함과 건강을 창조하셨죠.
이런 기적을 제외하고는 창조는 여섯째 날에 끝났습니다. 수천 년 동안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수백만 년이나 수십억 년 동안 지속되지도 않았습니다. 창조는 6일만에 끝났고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곱째 날이 특별한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창조가 완성되었음을 알려주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안식하다"라는 동사입니다. 2절입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절 하반절에 또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이 날이 특별한 이유는 하나님이 모든 창조를 마치셨기에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시고 안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치셨다거나 피곤하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사야 40장 28절에서 말하듯이 주님은 피곤하지 않으십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것은 단지 일을 그치셨다는 의미일 뿐이지 기력을 보충해야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것은 만족하셨다는 뜻입니다. 1장 31절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완벽했습니다. 완전히 만족하신 상태에서 안식하신 겁니다.
참고로 더 이상의 창조는 없었습니다. 잠시라도 하나님이 하셔야만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3장까지, 그리 오래지 않아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하나님께서 일을 하셔야 할 때까지 다시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6일간의 창조 후에 하나님이 처음 하신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3장 21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그리고 나서 동산에서 쫓아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끝과 인간의 타락 사이에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타락과 함께 하나님의 일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장이 말하는 것처럼 창조물을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보존하셔야 했습니다. 이제는 썩어질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우주, 곧 자신이 만드신 창조세계를 보존하시기 위해 일하셨고, 창조세계의 속량을 위해 필요한 모든 측면들을 성취하기 위해 일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 구절에 사람들이 안식해야 했다는 말은 전혀 없습니다. 인간이 안식해야 했다는 말도 없고, 아담이 안식해야 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아담은 죄가 없고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동산을 지키는 간단한 일을 할 때도 기력이 소모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에게는 안식일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왜 쉬겠습니까? 일할 필요가 없으니 땀도 흘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기력을 잃을 아무런 이유가 없는 낙원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에게는 안식일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일곱째 날이 예배하는 날이 될 것이라는 말도 전혀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것에도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하나님께만 국한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완성하셨고 만족하셨으며 그치셨습니다. 이것이 안식의 구성 요소입니다. 그리고 3절에서 세 번째 동사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하나님은 일곱째 날이 하나님의 창조와 그 완벽함을 기념하는 특별한 날이 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곱째 날을 다른 날들보다 높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창조 사역에 담긴 영광을 기억하는 기념일로 말이죠. 이로부터 매 일곱째 날은 하나님이 6일 동안 우주를 완벽하게 창조하셨음을 상기시키는 날이 되었습니다.
왜 전 세계적으로 7일 단위의 달력을 사용하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왜 7일일까요? 이 7이라는 숫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는 한 주, 한 달, 1년을 7일 단위로 지정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없습니다. 사실 다소 이상한 방식입니다. 10일 단위로 하는 것이 더 간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일 단위가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방식이 되었습니다. 보편적이면서도 동시에 독특한데, 왜냐하면 매 7일째 되는 날은 6일간의 장엄한 창조 속에서 표현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상기시키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 6일 동안 창조하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은 일곱째 날이 복된 날임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든 수천 년, 수백만 년, 수십억 년을 사용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일곱째 날이 거룩한 날임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7일이라는 단위 안에 살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항상 그렇게 해 왔습니다. 그 이유는 일곱째 날마다 하나님이 전 우주를 6일 만에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에는 복음을 증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 읽지는 않겠습니다. 천사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복음을 증거합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은 영원한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모든 일곱째 날은 창조주에 대한 증언인 것입니다.
기독교적 영향 아래 있는 미국이나 서양 국가들은 주 5일제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 기저에는 토요일이 창조세계를 즐기는 날이라는 의미가 깔려 있습니다. 토요일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영속적인 증언입니다. 반면에 일요일은 구원자 하나님에 대한 영속적인 증언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다시 창세기 2장으로 돌아가보면, 안식일이 율법이라는 언급이 없습니다. 안식일이 예배의 날이라는 언급도 없습니다. 창세기 2장 이후로 안식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은 출애굽기 16장입니다. 수백 년이 흘렀고, 족장들은 이미 죽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한 이들 중에서 안식일에 예배를 드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안식일은 이들을 위해 지정되었습니다. 하지만 명령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요셉을 비롯한 당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안식일이 명령으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이 중요한 의미로 처음 언급되는 것은 출애굽기 16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 하나님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시며 안식일을 언급하셨습니다. 만나는 안식일을 제외하고 매일 내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 전날 안식일에 먹을 것까지 충분히 거둬야 했는데, 안식일에 일하지 말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0장에서 주어지는 십계명에 대한 일종의 예고편이라고 할 수 있죠. 십계명을 통해서 안식일에 대한 율법을 규정하는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구체적인 율법을 주신 겁니다.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안식일이 창세기에서는 인간을 위해 제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말이죠. 안식일은 공식적으로 출애굽기의 모세 율법에서 제정되었습니다. 이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출애굽기 31장을 보겠습니다. 12절부터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왜일까요?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하라.”
여기서 우리는 안식일이 표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일은 표징입니다. 다시 말해 다른 무언가를 가리킵니다. 일종의 상징입니다. 안식일 계명이 십계명의 중간, 엄밀히 말하자면 중반부에 위치한 이유는 모세 언약과 연결된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노아와 언약을 맺으실 때, 하나님은 노아에게 다시는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면서 표징을 주셨습니다. 노아 언약의 표징은 무엇이었습니까? 무지개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도 표징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표징,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표징은 할례였습니다.
그리고 모세 언약에서 또 다른 표징이 주어집니다. 바로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단지 표징일 뿐이었습니다. 위선적인 마음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이사야 1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호세아 선지자도 안식일을 위선적인 마음으로 지키는 것에 비슷한 심판을 선포합니다. “내가 그의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헌신하지도 않으면서 외적으로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상징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이 표징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왜 이 표징이 주어졌을까요?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안식일은 창조를 기억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이 낙원을 잃었다는 것, 인간이 낙원을 잃었다는 것을 기억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반복해서 “이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로운 행위로 에덴동산, 즉 낙원에서의 삶이 회복될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의로운 행위는 또한 미래, 즉 낙원이 회복될 미래의 왕국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 이스라엘이 쉬는 모든 안식일은 완벽한 창조, 의로움이 지배하는 하나님의 낙원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낙원은 죄로 인해 상실되었고 오직 의로움을 통해서만 다시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칠일 체계를 제정하셨는데, 이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17절입니다.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일곱째 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날이었습니다. 일곱째 날은 낙원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리고 낙원을 다시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즉 의로움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어야 했습니다. 일곱째 날에 하나님의 율법에 비추어 자신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어야 했습니다. 안식일의 목적은 죄를 깨닫고 회개에 이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일곱째 날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식하게 했지만, 모세 율법에서 제정된 안식일은 하나님을 율법을 주신 분으로 인식하게 했습니다. 첫 번째 관점은 창조의 경이로움에 대한 감사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잃어버린 모든 의로움에 대한 회개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창조를 상기시키지만, 원래 완벽했던 하나님의 창조물이 이제는 손상되었고, 우리도 손상되었으며, 모든 피조물이 죄로 얼룩졌고, 우리도 죄로 얼룩졌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바울이 말한 대로, 피조물은 탄식하고 있고 우리 또한 탄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언약 중간에 있는 할례의 표징은 이런 뜻이었습니다. “너희는 깨끗해질 필요가 있다. 정결해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여기 십계명의 중간에 있는 안식일이라는 표징도 본질적으로 같은 뜻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낙원을 잃어버렸다는 점을 인식해야 하며,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율법을 지킬 수 없었지만, 이스라엘은 안식일에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구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 계명은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오늘 아침에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이 오셨을 때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여러분에게 드린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이 하신 일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악한 제사장들을 없애고 선한 제사장들만 남기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사장 제도 자체를 없애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는 태도를 개선하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희생제사 자체를 완전히 없애버리셨습니다. 왜냐하면 유대교의 모든 의식, 모든 의례, 모든 제사, 모든 외적인 장치들, 성전, 지성소, 이 모든 것을 포함한 유대교 그 자체에 종지부를 찍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안식일도 포함됩니다, 안식일도 포함됩니다. 안식일 준수는 유대교에 속한 모든 것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안식일을 대하신 예수님의 태도를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전에도 말씀드린 바 있지만 예수님은 원하시는 대로, 절대적으로 원하시는 대로 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새 언약,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십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희생 제사 제도를 없애신 것처럼 안식일 제도도 없애셨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마가복음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봤지만, 이 사실이 오늘 저녁 메시지의 핵심이기 때문에 몇 구절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2장 1절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참고로, 사실 구약에는 이를 금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허용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구약의 율법에 금지 조항을 끝없이 덧붙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것이 정말 나쁜 행동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다윗이 일행들과 함께 진설병을 먹은 일이 더 심한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너희는 안식일에 일하는 것을 큰 문제로 삼고 있는데, 너희가 일하지 않는 동안 모든 제사장들은 일하고 있다는 걸 아느냐? 온갖 희생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일하고 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안식일 계명이 도덕법이 아니라 상징적인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에 대한 우려에 동의하기보다는 안식일을 범하는 다른 사례들을 지적하신 겁니다. 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예수님은 안식일에 대해 무엇이든 원하시는 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제정하실 수도 있고, 금지 조항을 만드실 수도 있고, 모세 율법에서처럼 그 명령을 어길 경우 사형을 요구하실 수도 있고, 또는 완전히 없애버리실 수도 있습니다. 안식일을 폐하실 수도 있고, 무효화하실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신약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에 따라 유대교 체계의 모든 것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4장을 보십시오, 누가복음 14장입니다. 1절에 안식일이 나옵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누군가를 치유하는 것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치유를 행하신 것 같습니다. 안식일이라는 상징에 타격을 주기 위해서죠. 예수님은 안식일의 끝을 선언하고 계신 겁니다. 참고로, 치유는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누군가를 치유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좀 전에 살펴봤던 마가복음 2장으로 다시 가보겠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삭을 잘라 길을 만들었습니다. 동일한 기록이 마태복음에도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이에 예수님이 다윗과 그 일행에 관한 일화를 설명하시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7절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하나님은 안식일을 복되고 휴식을 주는 날로 만드셨습니다. 일주일 중 하루를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에 감사하는 동시에 낙원을 잃어버렸음을 인식할 수 있는 날로 만드셨습니다. 창조에 대해 감사하는 날이자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날이었습니다. 안식일이 율법의 중심에 있었던 이유는 백성들이 행위로는 율법을 지켰지만 마음으로는 어기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말이죠. “마음으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죄를 저지른 것과 같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안식일을 주신 이유는 인간이 복을 누리고, 노동을 벗어나 쉼을 얻으며, 항상 안식할 수 있었던 타락 이전 에덴에서의 삶을 맛보게 하며, 창조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할 기회를 주고, 율법에 비추어 자신의 삶을 돌아볼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안식일에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용서와 자비를 구하며, 그 결과로 기쁨과 평안과 구원을 얻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안식일보다 위대하십니다. 안식일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예수님이 의도하신 대로 될 것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안식일은 도덕법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모세 시대까지 주어지지 않았으며, 그리스도 시대에 폐지되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을 보겠습니다. 이 시기에 예수님을 반대하는 세력이 수면 아래에서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 특정한 치유 사건으로 인해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명절이 되었습니다. 정확히 어떤 명절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떤 절기이든 간에 안식일이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그런데 이 뒤에 나오는 말씀의 진위성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방금 읽어드린 3절 하반절과 4절은 아마도 나중에 추가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괄호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5절부터는 확실히 원본에 있는 내용입니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아마도 아까 읽어드린 것처럼 물이 움직일 때 첫 번째로 들어가는 사람이 치유를 받는다는 일종의 미신이 있었을 겁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여기서 ‘자리’란 매우 가벼운 짚으로 만든 일종의 깔개인데 말아서 겨드랑이에 낄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9절입니다,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이 날은 안식일이니.”
구약의 법은 걷거나 자리를 들어 옮기는 것도 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랍비 전통에는 거의 40가지의 금지 조항이 있었습니다. 이 내용은 미쉬나에 있는 것으로, 그 중 하나가 자리, 깔개를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병자에게 안식일을 범하게 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그 병자를 안식일에 치유하실 필요가 없었고,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행동을 하라고 명령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15절입니다. “그 사람이 가서 유대인들에게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예수님은 결코 십계명을 어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법을 결코 어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셨고 죄가 없으셨으며 부정하지 않으셨고 죄인들과 분리되어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에 원하시는 모든 일을 하셨고 그렇게 하시는 모습이 지도자들에게 드러났습니다. 유대교 전체 체계를 무너뜨리는 일의 일환이었기 때문입니다.
17절에서 예수님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정말 놀랍습니다. 자신의 신성을 주장하시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나는 내 아버지와 함께 너희 눈앞에서 우리의 일을 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18절입니다.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예수님은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부르시면서 지속적으로 안식일을 범하는 행위를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하고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셨다는 이유로 비난했습니다. 결국에는 예수님을 죽이게 만든 원인이 되었죠. 예수님은 옛 언약, 구약의 안식일 법에 맞추어 행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과 하나이신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고 안식일의 주인으로서의 위치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엄격하게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구약의 율법과 그에 따르는 부가적인 규정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의 본질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구원을 받으려는 끝없는 노력에서 어떤 안식도 찾지 못했습니다. 진정한 회개도 찾지 못했습니다. 안식일 법은 단순히 소망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으로써 매주 천국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나게 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천국을 되찾는 것은 오직 의를 통해 가능한 일이었죠.
안식이란 이러한 끝없는 투쟁과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끔찍한 부담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진정한 안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제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새 언약 아래에서 우리는 치유받고, 정결케 되고, 발견되고, 받아들여졌습니다. 우리는 창조주 예수님과 함께 안식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의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선물에 기뻐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한 모든 노력에서 벗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문자 그대로 안식일을 없애셨습니다.
신약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안식일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신약은 안식일에 대해 뭐라고 알려줄까요? 히브리서 3장을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3장에는 안식일과 관련된 많은 내용이 있습니다. 핵심이 되는 부분만 짚어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 저녁예배 때는 일요일, 곧 주일에 대해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목적에 어떻게 부합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이제부터 남은 시간에는 확실한 구절을 몇 개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3장 7절이 좋은 출발점이 될 것 같네요.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참된 안식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안식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안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민족을 약속된 안식의 땅으로 인도했지만, 단지 일시적인 지상의 안식에 불과했습니다.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천국의 안식을 위한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은 “내 안식”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구원의 약속입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그 세대 전체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구원의 안식입니다. 불신은 안식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신약성경 저자들이 강조하는 안식, 심지어 매우 유대적인 서신인 히브리서조차 강조하는 안식은, 안식일 준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구원의 안식입니다.
4장 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신약성경이 관심을 가지는 안식은 한 주의 어느 날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2절부터 3절입니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신약성경에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십계명의 다른 조항은 신약에서 여러 번 반복되고 있지만, 네 번째 계명은 예외입니다. 네 번째 계명은 신약성경에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안식일 계명은 도덕법의 중간에 위치한 표징이자 상징으로, 사람들을 안식과 회개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이르면 안식일 계명은 다시 언급되지 않습니다.
신약에서 다루고 있는 안식은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영혼에 주어지는 안식입니다. 이것이 신약이 제시하는 안식입니다. 9절입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정말이지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으로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노력해서 가야 하거나, 선물로 주어지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죠?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노력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안식, 믿음의 안식에 들어가면 노력은 멈춥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간 그 날, 우리는 구원을 얻으려는 노력을 멈췄습니다. 그렇죠? 우리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이 강조하는 바입니다. 모세의 안식일, 상징, 표징은 진정한 안식을 흐릿하게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잠시 로마서 14장을 보겠습니다. 신약이 요구하는 안식이 영적인 안식, 즉 의에 대한 행위적 접근에서 안식하게 하는 구원의 안식이라면, 더 이상 안식일에 대해서는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14장 5절을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은 안식일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안식일이 꽤 깊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의 안식일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위해 안식일을 지켰던 겁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이는 음식법도 지켰다는 뜻입니다.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5절에서 말하듯이 각 사람은 자기 마음에 확신을 갖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합니다.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안식일을 가지고 논쟁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바울이 2절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음식법에 대해 걱정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안식일 준수에 대해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지나가는 규범의 일부입니다. 신약의 다른 부분에도 이러한 규정에서 스스로 자유를 느끼게 도우라는 지침이 있습니다. 양심에 반하는 일을 강요하지 말라는 겁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여전히 안식일 법과 음식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완전한 자유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하도록 두라는 겁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없다는 겁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바로잡으라”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9절입니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절기를 지키는 규범과 모세 율법의 안식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골로새서 2장입니다. 가장 명확한 부분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할례와 모세 언약의 안식일이라는 두 표징을 함께 다룹니다. 골로새서 2장을 보면 할례가 새 언약에서 완전히 폐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더 이상 할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골로새서 2장 11절입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본문은 우리가 내면에 할례를, 이를테면 큰 수술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할례를 버리라고 하십니다. 할례에 얽매이면 그리스도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표징은 지나갔습니다. 옛 언약이 사라진 이유는 구원할 수 없는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16절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누구든지 우리를 안식일에 얽매이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안식일은 매주 반복되는 안식일을 말합니다. 절기로서의 안식일은 “절기나 초하루”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 때문에 안식일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안식일은 성전과 제사장, 제사가 포함된 옛 체계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이제는 모두 끝났습니다. 그림자일 뿐 실체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과 낙원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가리킬 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의 끔찍한 심판 아래에 놓이게 되었고, 따라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 손에 있는 의와 자비와 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진정한 안식은 안식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졌습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이제 우리가 실체를 가졌으니 더 이상 그림자는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참된 안식,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몇 가지만 말씀드리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하나도 없습니다. 열 개의 계명 중에서 안식일 관련 계명을 제외하고 모두 신약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네 번째 계명은 신약에서 인용되지 않습니다. 새 언약 어디에도 안식일 관련 규범이나 규칙이 나오지 않습니다. 신약 어디에도 안식일에 할 행동에 대한 가르침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예루살렘 공회는 이방인 신자들이 교회에 들어올 수 있는 조건들을 결정했습니다. 공회는 이방인들에게 안식일 준수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안식일을 지키라고 누구에게도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꾸짖지도 않았습니다. 안식일을 범하는 것에 대해 신자들에게 경고하지도 않았습니다. 신자들에게 안식일을 고수하라고 권하지도 않았습니다.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라졌습니다. 다시 창세기 2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제 매번 맞이하는 모든 일곱째 날이 우리 창조주의 위대하심을 깨닫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식일 안에서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면서 안식일을 복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구속자로 인정하는 날이 첫째 날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모세 율법에 나오는 안식일을 기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죽은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우리는 창세기에 나오는 안식일을 기념하며, 하나님을 우리의 창조주로 찬미합니다. 그리고 한 주의 첫째 날에 하나님을 우리의 구속자로 찬미합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다음 주일에는 우리가 주일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일요일에는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을까요? 특별한 점이 있을까요?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주님께서 우리가 알기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 될 것입니다. 다음주에 살펴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멋진 하루를 주심에 감사합니다. 일관된 진리를 주심에 감사합니다.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성경의 영광스러운 진리를 명확하고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하심에 끝없는 기쁨을 느낍니다. 그림자와 표징, 상징을 넘어서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우리는 안식이라는 현실 속에 살고 있습니다. 행위를 통해 의를 얻으려는 몸부림과 노력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몸부림에서 해방되어 안식을 누립니다. 우리는 복음의 안식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안식 속에서 낙원을 맛보고 있으며, 언젠가는 하늘 낙원, 천국의 영광에 들어갈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천국을 맛보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우리에게는 매일이 안식일입니다. 매일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사역 안에서 안식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찬양을 돌리오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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