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ce to You Resources
Grace to You - Resource

지난 주일부터 성령님의 위격과 사역에 관한 시리즈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성령님의 위격과 사역을 살펴봄으로써 성령님을 합당한 방식으로 예배하자는 마음을 담아서 말이죠. 지난주에 언급했듯이, 제 생각에는 성령님이야말로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가장 많이 남용되는 분인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 말, 체험을 성령님께 돌리지만, 사실 성령님은 아무런 관련도 없으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에서 진리의 영으로 묘사된 성령님이 이토록 많은 거짓과 연관되어 있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수많은 거짓말쟁이들이 어그러진 욕망과 목표를 갖고 필요한 영향력을 얻기 위해서 거짓과 속임수를 성령님의 역사로 둔갑시키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끔찍한 일들이 성령님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분명히 경고하고 있는데도 그런 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음주에 좀 더 말씀드리겠지만, 이 경고는 성령님을 모욕하는 것, 성령님을 대적하는 것,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것, 성령님을 소멸하는 것에 관한 경고입니다. 이 경고에 사용된 동사들은 전부 성령님을 대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성령님을 모독하고 남용하는 것을 피하거나, 성령님과 무관한 일들을 성령님께 돌리는 것을 피하는 문제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특정 오류들을 피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성령님이 행하신 일과 성령님이 진정으로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온전히 예배해야 합니다.

지난주에 저는 1657년에 쓰여진 논문을 하나 읽었습니다. 영국의 위대한 청교도 신학자인 존 오웬의 작품이었습니다. 오웬은 성경과 신학에 대한 풍성한 이해를 돕는 수많은 책을 저술했죠.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석한 논문도 썼습니다. 여기에는 전형적인 청교도식 제목이 붙어 있는데,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하여, 각 위격별로, 사랑과 은혜와 위로 안에서>라는 제목입니다. 정말 전형적인 청교도식 제목입니다. 또 다른 제목도 있는데, 바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과 성도들의 교제>입니다.

존 오웬은 이 논문에서 우리가 삼위일체의 각 위격으로부터 개별적이고 구체적이며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삼위일체의 각 위격으로부터 이러한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삼위 하나님의 각기 구별된 위격에 개별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그러니까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섞이기보다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의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마지막 장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 구절은 삼위일체적 축도로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우리 믿는 자들에게 개별적으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주권적인 사랑을 베푸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주권적인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사랑을, 성자 하나님은 은혜를,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교제를 베푸십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삼위일체의 각 위격을 구분하고 각 위격의 사역을 밝히고 있는 겁니다. 우리의 교제는 성부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작되고, 성자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며, 성령 하나님의 교통하심으로 전달됩니다. 물론 성경에는 삼위일체의 사역이 중첩되어 나타나는 경우도 많지만, 각 위격이 각자의 방식으로 행하시는 특정한 사역 역시 강조되고 있습니다.

저는 참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가, 하나님이 삼위일체 한 분 하나님이시면서 성부, 성자, 성령의 각기 구별된 세 위격이심을 알면서도 구분하지 않고 뭉뚱그려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도 올바른 예배 방법입니다. 하지만 오웬이 요구하는 것은, 삼위 하나님의 위격을 구별해서 각 위격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어떻게 구체적으로 반응해야 하는지를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에 관해서 존 오웬은 이렇게 썼습니다.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모든 약속을 기억나게 하고, 우리 마음에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게 하며,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며, 구속의 날까지 우리를 인치시고, 우리의 최종적 유업을 보증하시며, 우리에게 위로의 기름을 부으시고, 우리의 양자됨을 확증하시며, 우리의 간구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그런 다음 오웬은 성령의 역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믿음의 지혜가 여기 있다. 믿음은 보혜사 성령의 이 모든 역사에서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을 만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역사에 무지함으로써 그 달콤함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어야 하고, 우리에게 마땅히 요구되는 감사 또한 소홀히 해서도 안 된다.” 삼위일체의 각 위격이 우리를 위해 특정한 일들을 행하셨기 때문에, 각 위격이 행하신 사역에 대해 구분된 방식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믿는 자로서 성령을 소멸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단지 성령을 근심하지 않게 하기를 원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을 거역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또한 단순히 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는 교제하고 예배하고 찬양할 때 묵상과 기도와 순종 가운데 하나님의 세 위격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삼위일체의 각 위격이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특별한 자비와 특별한 사역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이에 대한 반응으로 순종과 기쁨과 감사를 각 위격에게 돌려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존 오웬이 말하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또 다른 청교도는 토마스 굿윈입니다. 토마스 굿윈은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때로는 성부 하나님께, 때로는 성자 하나님께, 그리고 때로는 성령 하나님께 드려진다. 때로 우리의 마음은 우리를 택하신 아버지의 사랑으로 향한다. 때로 우리의 마음은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향한다. 그리고 때로 우리 마음의 사랑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살피시고 우리에게 계시하시며…” 이제 제가 정말 좋아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우리를 위해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시는 성령님을 향한다.” 여러분은 성령님이 우리의 성화를 위해 모든 수고를 하신 것에 대해 감사드린 적이 있으십니까? 계속 읽습니다. “성령님, 감사합니다. 저를 가르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육신과 싸워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를 위해 중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를 인치시고 보호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유혹의 길에서 저를 인도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죄와 맞설 때 능력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것이 바로 토마스 굿윈이 주장하는 바입니다. 굿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삼위일체의 각 위격의 사역을 분명히 이해할 때에만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계속 읽습니다. “우리는 세 위격 모두가 우리 안에 균등하게 자리하실 때까지 결코 만족해서는 안 된다.” 정말 아름다운 표현 아닙니까? 말하자면 삼위의 하나님 가운데 앉아서 세 위격 모두가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약속하신 가장 귀한 경험입니다. 말하자면 삼위일체 한가운데 앉아서 성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사랑, 성자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사랑,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사랑을 모두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우리는 믿는 자로서 성부 하나님의 사랑, 택하시는 사랑, 주권적인 사랑에 대해, 성자 하나님의 희생과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에 대해 생각합니다. 이를 바라보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작정하셨고,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으며, 성령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전하십니다. 아버지는 우리를 생명으로 택하시고, 아들은 생명을 주시기 위해 희생하셨으며, 성령은 우리에게 그 생명을 주십니다. 따라서 삼위일체 각 위격의 사역을 인식하면 온전한 예배를 드리고 온전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짧은 시리즈를 통해 우리가 하려는 일은 복되신 성령님의 사역과 역할에 대해 더 잘 이해해서 성령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과 예배의 수준을 높이고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 중에서 가장 놀라운 말씀이 요한복음 16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읽어드렸죠. 생각할수록 정말 놀라운 구절입니다. 요한복음 16장 7절에서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주님은 항상 실상, 진리만을 말씀하셨죠,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잠시 멈추고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제자들은 3년 동안 거의 24시간 내내 주님과 함께 지냈기 때문에 주님은 제자들의 전부였습니다. 그야말로 절대적인 존재였죠. 요한복음 6장에 따르면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예수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을 대표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우리는 어디로도 가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모든 것, 보고 싶어 하는 모든 것, 필요한 모든 것을 주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전부이십니다.” 이런 제자들이 어떻게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는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무엇이 주님보다 더 좋을 수 있겠습니까?

유대인들이 수천 년 동안 메시아가 오시기를 기다려 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알고 있던 모든 세대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실 때 자신들이 살아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메시아가, 예수님이 오시자 당시 사람들은 거부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과 제자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모든 구속의 역사가 성취된 것이었습니다. 타락이 발생했던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에서 시작해서 말이죠. 메시아가 오셨다는 것, 실제로 그곳에 계셨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아무데도 가지 않으시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 곁에 머물러 계시면서 왕국을 세우시기를 원했고, 그것이 모든 일의 끝이며 정점이자 완성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잡히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 계셨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곧 떠날 것이다. 너희는 내가 있는 곳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르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성령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이 그 전에는 계시지 않았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요한복음 14장입니다. “그가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앞으로는 어디에 계신다고 합니까?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성령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창세기를 보면 수면 위를 운행하시면서 창조하셨습니다. 성령님은 항상 생명을 주시는 분이셨고, 항상 죄를 깨닫게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창세기 6장에 의하면 항상 사람들과 함께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성령님은 항상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타락 이후로 죽어 있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성령 없이는 구원도, 믿는 믿음도, 구원에 이르는 회개도, 진정한 회심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인도하고 이끄시기 위해 항상 계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어느 정도 성령님의 사역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라는 말씀은 구원과 성화와 같은 필수적인 일에 성령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이제 아들이 오셨습니다. 그게 더 좋은 일 아닙니까?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하는 것이 훨씬 더 놀라운 일 아닙니까? 누군가는 분명히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물론 이것은 구약 시대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도 성령님은 계셨고, 아들은 오시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성령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셨고 이제 아들도 오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이라”고 말씀하신 걸까요?

그 이유는 성령님께서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사역을 교회 시대부터 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함께 계시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계시고 안 계시고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와 범위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성령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의 우리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놀라운 현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성령님은 매우 매우 특별하신 분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역사로 돌려지는 끔찍한 일 대신에 성령님의 진정한 사역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성령님을 예배할 수 있고, 굿윈이 말했듯이 삼위일체의 모든 위격이 우리 안에서 동등하게 자리잡고 동등하게 찬양을 받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사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어디를 봐야 할까요?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는 로마서 8장을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지금까지 간략하게 서론을 다뤘으니, 이제 로마서 8장을 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장을 통해 성령님의 사역을 살펴볼 것입니다. 진행하면서 약간 다른 주제로 빗나갈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성령님에 관한 신약의 모든 구절을 다루지는 않을 겁니다. 대신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에 초점을 맞출 겁니다. 로마서 8장이 훌륭한 출발점이 되는 이유는 성령님의 사역이 구원과 관련되어 제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해야 할 점은 로마서 1장부터 7장까지의 주제가 모두 구원과 관련되어 있다는 겁니다. 모두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1장 16절부터 복음으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런 다음 바울은 복음의 본질을 풀어나가기 시작합니다. 죄와 심판에 대해 말하고, 스스로 의롭게 되려는 시도가 헛되다고 말합니다. 은혜와 믿음에 대해 말하면서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십자가의 의미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해 말합니다. 그렇게 8장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구원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8장에서는 구원의 영광이 무엇인지 최종적으로 요약합니다. 구원의 의미를 요약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에게 좋은 소식이 주어졌는데 이 모든 것은 성령에 의해, 성령님에 의해 우리에게 보장됩니다.

이제 1절과 2절에서 시작해 보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시는지 살펴봅시다. 지금부터 8장에 나오는 성령의 사역을 차례로 나열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먼저 이 모든 것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로마서 8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어떻게 죄인에게 정죄함이 없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가능할까요? 2절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정죄함이 없는 이유는 생명의 영이 하신 일 때문입니다. 생명의 영이란 성령님을 말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2절에서 성령님을 만나게 되고, 여기서 첫 번째 요점이 나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심으로써 우리를 사망에서 해방시키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심으로써 우리를 사망에서 해방시키십니다. 이것이 정죄함이 없는 삶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여기서 다시 살펴봐야 할 점은, 1절의 “그러므로”라는 단어가 전에 언급한 모든 내용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구원의 영광과 아름다움에 대해 말했던 모든 내용과 말이죠. 7장 25절과 연결되는 것도 아니고, 7장 1절부터 연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1장 16절, 복음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 곳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모든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요약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좋은 소식입니다. 완전히 타락한 죄인인 우리가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데, 그럼에도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정죄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좋은 소식입니다.

이 좋은 소식을 이해하려면 먼저 나쁜 소식을 이해해야 합니다. 나쁜 소식은 성경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을 '진노의 자녀'로 지칭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3절에서 말하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진노의 자녀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진노의 자녀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식 표현 방식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저주받을 자들의 본성을 물려받았다는 뜻입니다. 부패의 자녀란 본성이 부패했다는 뜻입니다. 진노의 자녀란 심판을 받도록 선고받았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은 진노의 자녀입니다. 모두가 정죄 아래 있는 비참한 상태입니다.

정죄 아래에 있다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요? 우리는 죄에 압도당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저주 아래 있습니다. 우리는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 그대로 죄에 압도되어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죄는 모든 인간의 영혼을 불구로 만드는 더러운 질병입니다. 모든 사람을 타락시키고 불안하게 만듭니다. 평화와 기쁨을 빼앗고 그 자리를 고통과 아픔, 두려움으로 채웁니다. 죄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치명적인 부패의 원리를 심어놓는데, 그 누구도 극복할 수 없고 그 누구도 치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치유 불가능할 정도로 죄로 가득하고 사악할 뿐만 아니라, 사악한 천사이자 마귀인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겁니다. 사탄 왕국의 일원이자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우리는 마귀의 자녀입니다. “너희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에베소서 2장 2절이죠,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사탄은 모든 인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부패했을 뿐만 아니라 사탄으로 인해 더욱 부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우리는 마귀의 욕심대로 행합니다.

그 결과로, 로마서 8장 20절에서 말하듯이 우리는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죄에 압도되고 사탄의 지배를 받는 상태에서 모든 나쁜 일, 모든 끔찍한 일에 노출된다는 의미입니다. 삶의 헛됨과 공허함과 비통함과 슬픔과 고통입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 태어납니다. 우리에게는 평화가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불안으로 가득하고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27절에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든 인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옥뿐입니다. 지옥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4절에 따르면 둘째 사망과 불못에 의해 영원히 저주받게 됩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이 처한 비참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그 형벌은 마땅한 정죄입니다. 마땅한 정죄입니다. 로마서 3장 8절과 9절이 말하듯이 우리가 정죄 받는 것은 마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어겼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고 합니다. 우리가 정죄 받는 것은 마땅합니다. 십자가 위의 강도처럼 우리는 마땅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죄인은 진노의 자녀로서 모든 죄를 싫어하시고 의로운 심판을 내리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가피한 결말은 영원한 지옥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이 오시기 전까지 모든 사람의 상태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어두운 상황 속에서 영광스러운 빛이 나타납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원리 혹은 능력 혹은 영향력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성경은 정죄하는 책, 강하게 정죄하는 책입니다. 로마서 5장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아담으로부터 죄의 본성을 물려받았다고 합니다. 로마서 5장은 이 사실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은 모든 죄인에게 임할 최후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울지를 보여줍니다.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죄인들은 주님과 주님의 권능의 영광에서 끊어져 영원한 멸망이라는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지옥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감각적인 것으로, 실제적인 고통입니다. 다른 하나는 부재, 즉 하나님의 부재입니다. 그야말로 진짜 지옥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글쎄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우리가 지켜야 할 기준을 주지 않으셨나요? 그 기준에 따라 살면 괜찮지 않을까요? 결국에는 천국에 가지 않겠어요?” 하지만 이것은 세상에 널리 퍼진 오해일 뿐입니다. 참으로 저주받을 만한 오해죠. 왜냐하면 율법이 아무리 거룩하다고 하더라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완벽하게 거룩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본성에 담긴 윤리를 성문화하고 기록하고 설명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없앨 수 없으며, 우리에게 정죄를 피할 방법을 줄 수 없습니다.

로마서 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율법이 하는 일은 우리가 선하다고 주장할 때 입을 닫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이 하는 일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하는 모든 일은 죄를 보여주는 것 뿐입니다. 죄를 극복하게 하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가 초래하는 정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이 아닙니다. 율법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상태를 바꿀 수 없습니다. 단지 드러나게 할 뿐입니다. 또한 우리가 받을 정죄를 바꿀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더 강화시킬 뿐이죠.

사실 율법은 범죄를 더하기 때문에 상황을 더 악화시킵니다. 따라서 율법으로는 누구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롭게 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에 의해 우리의 허물이 더 커지고 죄가 더해집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 오직 정죄만이 있을 뿐입니다. 율법은 구원할 수 없고 정죄를 면하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3절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달리 말하면 인간이 율법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죄는 헬라어로 ‘카타크리마’인데, 판결 그 자체보다는 선고 후의 형벌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판결이나 선고 자체를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가 따로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정죄라는 단어는 선고를 넘어 실제적인 처벌까지 포함하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따라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어떠한 처벌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법을 어겼는데도 불구하고, 정죄함이 정당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올바르며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부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둠의 왕국과 사탄에게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원을 통해 정죄함이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 “없나니”는 강한 부정을 의미하는 아주 확고한 단어입니다. “없다”를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 중에서도 매우 강력한 표현입니다. 확실하고 분명하게 정죄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자, 이것이 바로 좋은 소식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죄악된 존재라 할지라도, 전혀 정죄함이 없는 상태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그 상태는 어떤 상태일까요? 어떤 곳일까요? 바로 그리스도 안입니다. 1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이라고 하고, 2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영적으로 매우 실제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잠시 로마서 6장 3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여기서 '세례'는 물로 받는 세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은유적 의미에서 '잠기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다시 말해, 우리는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놓이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6장 5절부터 읽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 모든 것이 제가 방금 읽어드린 6장에서 설명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의 정의를 다시 내리지는 않겠습니다. 이미 모두 설명되었기 때문이죠.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단 하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가 없다는 것,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우리는 정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놓여 있습니다. 정죄의 범위를 벗어난 곳에 있습니다. 이것이 이 장의 시작이면서 이 장의 끝입니다. 8장의 끝에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35절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습니다. 38절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다시 말해서, 실제로 존재하는 모든 것,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이나 단지 상상 속에만 있는 것들을 모두 나열해 보아도, 이 중 어느 것도 우리의 상태를 바꿀 수 없다는 겁니다. 정죄함이 없는 우리의 상태를 바꿀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정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장 전체는 믿는 자들의 안전에 대한 길고도 정말 흥미진진한 증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장의 주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지금이나 앞으로도 정죄로부터 안전하고 보호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장의 후반부에서 말하듯이, 설령 사탄이 나타난다 해도, 누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능히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정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해 이 일을 행하시는 성령님께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정죄를 넘어선 이유는, 2절에서 말하듯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법’이라는 단어는 성경적인 의미나 성문화된 의미의 율법이 아닌 원리, 지배적인 능력이란 의미로서 생명의 성령이 압도적인 능력으로 사망으로 이끄는 죄의 지배력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놀랍고 분명하고 구체적인 선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갔습니까? 말 그대로 사망에 이르는 죄의 상태에 있던 우리를 건지시고 생명을 주신 성령께서 예수님 안에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생명의 영, 거듭나게 하는 영, 생명이신 영, 생명을 주시는 영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성령님을 묘사하는 표현이죠.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그리스도 없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만일 그가 그리스도를 소유했다면 동시에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다. 양심에 평안을 주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그리스도에게 전가하셨고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의를 우리의 것이 되도록 주셨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안수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치유된다. 예수님이 자신의 겉옷을 우리에게 던져 주셨기에 우리가 그 옷을 입을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영광스러운 구주이시며 영원히 찬송 받으실 분이시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와 맺고 있는 이 연합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죽음의 상태에서 건지시고 그리스도와 연합의 관계가 되게 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습니다.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루터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은 아내가 남편과 연합되는 것처럼 영혼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킨다. 그리스도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은 믿는 영혼의 소유가 되며 영혼이 소유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다. 그리스도는 모든 복과 영생을 소유하고 계신다. 영혼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그때부터 그것은 영혼의 소유가 된다. 영혼은 모든 불의와 죄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것은 연합 이후로부터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다. 그때부터 복된 교환이 시작된다.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그리스도, 결코 죄를 짓지 않으시고 완전히 거룩하신 그리스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그리스도께서 믿음의 혼인 반지를 끼고 믿는 자의 모든 죄를 스스로 감당하신다. 그 죄들은 예수님 안에서 잃어버린 바 되고 폐기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무한한 의 앞에 어떤 죄도 남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의 영혼은 죄에서 해방되고 영원한 의의 옷 곧 그의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게 되기 때문이다.” 얼마나 행복한 연합입니까? 누가 그렇게 하나요? 이것은 생명의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와 사탄과의 연합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역사 말이죠.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입니다. 2절이 의미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잠깐 다시 돌아가서 2절의 끝을 보면, 우리는 사망을 낳는 죄의 지배적인 법칙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죄의 결과로 인한 영적 사망의 상태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방되었습니까? 생명의 성령의 압도적인 능력에 의해서 해방됩니다. 이는 오직 복되신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성령님은 생명의 영이십니다. 고린도후서 3장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을 보면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6절, 17절, 18절에 나와 있죠. 갈라디아서 6장 8절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고 말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직도 의문이 드신다면,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네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느니라. 위로부터 나야 하느니라. 성령님이 생명을 주시는 바로 그분이십니다. 성령님이 거듭나게 하는 분이십니다.

잠깐 디도서를 봅시다. 디도서에 구원에 대한 놀라운 설명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것들이 좀더 분명해질 겁니다. 디도서 3장 3절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이는 모든 인간에 대한 묘사입니다. 아름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여기에 하나님의 자비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되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역사하며 성령님과의 교통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어떻게 타락과 저주의 상태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어떻게 사탄의 지배로부터, 죄의 압제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네, 그러니까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선함에 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누구에 의해서라구요? 성령님에 의해서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가 성령님의 충만한 풍성하심을 정말로 온전히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온전히 알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와 같은 새롭게 하심, 씻음, 거듭남이 이루어졌을까요? 이 생명이 어떻게 왔습니까? 누가 우리를 살아 있게 하셨습니까? 바로 생명의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어떻게 그렇게 하셨습니까? 처음에 제가 요한복음 16장에서 읽어드린 바와 같이, 성령님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죄인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성경의 저자이십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숨결을 불어 넣는 영적 감화는 하나님의 영, 프뉴마에 의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경을 기록했다고 증거합니다. 따라서 성령님이 거룩한 성경의 저자이십니다. 그러니까 첫째, 성령님은 죄인을 책망하십니다. 둘째, 복음의 저자이신 성령께서 복음을 전해 주셔서 야고보서 1장 18절 말씀대로 우리가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베드로전서 1장도 같은 말을 합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났습니다. 성령님은 책망하는 분이십니다. 복음의 저자이십니다. 우리의 교사가 되시고 거듭나게 하는 능력으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셔서 우리가 복음을 믿고 죄에서 돌이키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모든 역사입니다. 살리시는 영, 생명을 주시는 영, 생명의 영이십니다.

저는 여러분이 성령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것들에 대해서, 그러니까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책망해 주시는 것에 대해서, 진리의 말씀, 은혜의 복음, 거룩한 성경을 기록해 주신 것에 대해서, 진리의 말씀을 전하시는 진리의 영께서 생명과 명철을 주셔서 여러분이 진리를 듣게 하시고, 살아있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고, 진리를 믿게 하시고, 문자 그대로 죄와 사망에서 생명으로 구원해 주신 것에 대해서 정말로 성령님께 감사를 돌린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생명을 가지고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고 있기 때문에 정죄받지 않는 상태에 있습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는 상태입니다.

성령님은 어떻게 이것을 행하실 수 있었을까요? 성령님은 어떻게 이것을 행하십니까? 3절 말씀에 있는 조건 때문에 하실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좀 더 살펴보겠지만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율법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율법이 연약했던, 부족했던 이유는 육신으로 하여금 능히 지킬 수 있게 하는 능력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더 나은 사람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율법은 완벽한 기준을 세울 수는 있었지만 육신이 그것을 지킬 수 있게 해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연약했던 것은 육신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서 율법 자체가 연약한 것이 아니라 육신이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부족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성령님을 통해 행하셨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이루셨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죄를 위한 제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육신에 있는 죄를 정죄하셨습니다.

그 차이점을 설명드리겠습니다. 3절 마지막 부분입니다.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율법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율법은 죄인을 정죄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죄인’을 정죄합니다. 반면 십자가는 ‘죄’를 정죄했습니다. 차이점이 보이시나요? 율법은 죄를 정죄할 수 없고 오직 십자가만이 죄를 정죄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죄인’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십자가는 ‘죄’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죄는 죽었고 더 이상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는 힘이 아닙니다. 죄는 더 이상 마땅한 처벌과 처형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죄인을 정죄합니다. 십자가는 죄를 정죄합니다.

어떻게 십자가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모든 형벌을 완전히 다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정하신 죄의 대가를 완전히 다 치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우리의 모든 죄가 전가되었고 우리의 모든 죄의 대가도 치러졌습니다. 율법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율법은 모든 죄인을 정죄합니다. 율법은 죄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위해 죄를 정죄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이번주에 성령님에 관한 찬송가를 찾아봤는데, 그런 찬송가가 몇 곡 있긴 합니다만, 대체로 뭐랄까 좀 너무 감상적이면서 감정적인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좀 더 파고들어 장로교 찬송가를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장로교는 보통 좀 더 신학적이니까요. 그러다가 이 찬송가를 발견했는데,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찬양입니다. 멜로디를 흥얼거릴 수는 있지만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네요. 어쨌든 성령님에 대한 오래된 찬송가입니다. 제가 찾은 유일한 것인데, 가사가 이렇습니다. “성령님이시여, 우리가 당신을 경배하나이다. 부활의 최고의 선물이시여, 승천하신 보좌에서 보내신 분, 신성의 충만하심이여, 오셔서 당신의 생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소서.” 바로 성령께서 하신 일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으로 만들기 위해 오셨습니다.

참고로 이 곡을 쓴 사람은 마가렛 클락슨입니다. 조금 아시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찬송가는 이렇게 계속됩니다. 제가 약간 다듬긴 했지만 성령님을 향해 이렇게 노래합니다. “창조의 여명에 생명 없는 심연을 품으셨던 성령님, 당신은 여전히 우리 본성의 어둠을 가로질러 우리 영혼을 잠에서 깨우시려 움직이시나이다. 우리를 움직여 일으키시고, 이끄시며, 생기를 불어넣으시고, 죄책감으로 우리를 찌르시나이다. 우리를 탄생시키고, 인치시며, 채우시는, 내재하는 구원의 대언자시여. 당신 자신이 살아있는 저자로서, 거룩한 말씀을 생명으로 깨우시고, 우리와 함께 그 거룩한 내용을 읽으시며, 부활하신 주를 나타내시나이다.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분은 당신이시니 반역하는 마음을 가르쳐 기도하게 하시나이다. 당신의 거룩한 중보가 우리를 위해 밤낮으로 올라가나이다." 이 모든 것이 절대적인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령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멘이십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볼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진리의 가장자리를 겨우 긁고 있을 뿐이지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로 채우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모든 일로 인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나무에서 짊어지셨다는 사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그가 찔림을 당하셨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그가 상하셨다는 사실, 우리의 평화를 위한 징계가 그에게 내려졌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다는 사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가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사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대한 이 모든 위대한 사실은 우리의 구원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작정하신 일을 그리스도께서 이루셨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전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생명을 얻었고 정죄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완전히 정죄받으셨음을 알기에 우리를 정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얼마나 믿을 수 없이 영광스러운 소식인가요.

하나님 아버지, 이토록 주권적인 사랑에 얼마나 감사드리는지요. 예수님, 은혜로운 희생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성령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때까지, 그리스도와 같아질 때까지 그 생명을 유지시켜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쁨과 감사로 경배를 올려 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This sermon series includes the following messages:

Please contact the publisher to obtain copies of this resource.

Publisher Information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Welcome!

Enter your email address and we will send you instructions on how to reset your password.

Back to Log In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Minimize
View Wishlist

Cart

Cart is empty.

Subject to Import Tax

Please be aware that these items are sent out from our office in the UK. Since the UK is now no longer a member of the EU, you may be charged an import tax on this item by the customs authorities in your country of residence, which is beyond our control.

Because we don’t want you to incur expenditure for which you are not prepared, could you please confirm whether you are willing to pay this charge, if necessary?

ECFA Accredited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Back to Cart

Checkout as:

Not ? Log out

Log in to speed up the checkout process.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Minimiz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