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ce to You Resources
Grace to You - Resource

하나님의 말씀 로마서 8장을 펴고 성령님 안에서의 삶에 대해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복되신 성령님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해 왔습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에서 성령님을 많이 언급하고 있지만, 대부분 성령님의 위격과 사역을 왜곡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소 대담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성령님의 사역을 사탄에게 돌린 것을 정죄하셨는데, 오늘날 현대의 오순절 운동에서는 사탄의 일이 성령님께 돌려지는 반대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슬프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령님에 대한 모욕이라고 할 수 있죠. 성령님이 얼마나 슬퍼하실까요. 복되신 성령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상대적으로 성령님이 덜 강조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성령님은 삼위일체 구성원 가운데 믿는 자의 삶에 가장 개인적이고 친밀하게 관여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로마서 8장을 통해서 이를 배우고 있습니다. 지금은 8장 중반부에 있는데, 24절부터 30절까지 읽겠습니다. 24절부터 30절까지입니다. 우리는 이미 24절과 25절을 살펴보았지만, 문맥을 파악하기 위해 다시 읽어야 합니다. 29절과 30절은 깊이 들어가지 않겠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파악하기 위해서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지금까지 우리는 성령님이 믿는 자 안에 거하시며 행하시는 사역이 얼마나 깊고 넓고 높은지를 배웠습니다. 2절과 3절은 성령님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켜 주셨다고 말합니다. 4절은 성령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고 합니다. 5절부터 11절은 성령님이 우리의 본성을 변화시키신다고 알려줍니다. 12절과 13절은 성령님이 우리가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14절부터 16절은 성령님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음을 증언하신다고 말합니다. 이는 17절로 이어지죠. 17절부터 30절까지의 긴 구절은 우리의 영원한 영광을 보장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방금 전에 성령님이 그 영광을 보장하시기 위해 본질적으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에 대해 읽었습니다. 26절을 통해서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그 전에 먼저 기초적인 내용을 말씀드겠습니다. 하나님이 믿는 자들에게 주신 가장 큰 복은 천국의 영광 속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확실한 약속입니다. 우리는 이미 8장 1절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죄받지 않는 상태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34절에서 “누가 정죄하리요?”라는 수사적 질문을 통해 다시 한 번 강조됩니다. 예수님이나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재판장이 있겠느냐고 묻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한 번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장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주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변할 수 없고 바뀔 수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영구적인 무죄 상태입니다. 즉, 그리스도에게 속한 우리는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29절에 본질적으로 요약되어 있죠.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이 과정에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의 그 어떤 교리도 이보다 더 위로가 되고, 이보다 더 힘을 주며, 이보다 더 격려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소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소망이란 막연한 바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확신입니다.

이와 연관되는 매우 유익한 구절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은 우리의 확실한 영광에 대한 축복의 송영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베드로가 송영을 터뜨린 것도 당연합니다. 우리는 미래의 영광에 대한 약속을 가지고 있으며, 그 영광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에게 실패하지 않고 죽지 않을 믿음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보장되며, 하나님의 능력은 다름 아닌 성령님이십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니라.” 신약성경은,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와 에베소서를 보면 성령의 인치심, 즉 미래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안전하게 인치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그러나 이 교리에 대한 구절 중에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본문보다 더 강력하거나 명확한 구절은 없을 겁니다. 우리는 영화롭게 될 때를 기다리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우리가 저주받은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거듭났지만, 여전히 속량받지 못한 육체에 갇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인간성으로 인해 탄식합니다. 우리는 하고 싶어하는 일은 하지 못하고,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됩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사망의 몸이 붙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여전히 썩을 몸, 없어질 몸을 가지고 있어서 이 몸을 벗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는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할 것을 입고,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영광을 갈망합니다.

그래서 19절부터 23절까지에서 바울이 피조물이 다 탄식하고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모든 피조물, 즉 생물과 무생물을 포함한 피조 세계가 아담과 이브의 타락으로 인한 저주의 짐 아래에서 탄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피조물만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23절에서 말하듯이 우리 또한 탄식합니다.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우리에게 약속된 온전한 영광에 이르기를 갈망합니다. 우리는 우리 죄의 무게를 느끼고, 하나님의 저주를 느끼며, 우리 안에 있는 타락의 권세를 느낍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를 따라다니는 부패를 인식하고 있고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압니다. 우리도 탄식하고 피조물도 탄식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영광스럽게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될 때 일어날 것입니다. 모든 저주는 일종의 창조세계 해체, 그러니까 내적인 원자폭발로 인해 사라질 것입니다. 뜨거운 열로 모든 원소들이 녹아버릴 겁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우주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생길 것이며, 그곳에는 그 어떤 저주도 없을 겁니다.

여기서 피조물은 의인화되어 고통을 느끼면서 그 날을 고대하고 있는 것처럼 표현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진정으로 그 날을 갈망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천국은 단지 황금 길로 가득한 곳이 아닙니다. 제가 천국에 가게 될 것이 기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말 기대되는 것은 천국이 죄와 유혹과 무지가 없는 곳이라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천국의 매력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영광을 바라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는 주목해야 할 세 번째 탄식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의 탄식입니다. 성령님의 탄식입니다. 우리로 교제를 누리게 하시는 복되신 성령님, 성령의 교통하심이라고도 불리죠, 성령님 또한 탄식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영화를 기다리며 탄식하고 계십니다. 피조물은 저주로 인해 고통받고 있습니다. 우리도 저주로 인해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성령님도 저주가 사라질 때까지 자신이 거하시는 믿는 자들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고통받으십니다.

지금까지 로마서 8장을 통해 우리는 본질적으로 성령님이 우리 삶에서 세 가지 놀라운 사역을 행하고 계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첫째로, 거듭남의 사역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죽어 있었을 때 성령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둘째로, 성화 사역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십니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은 이를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우리가 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그리스도는 성령 충만한 인성의 완벽한 본보기이시죠,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보기로 삼고 신성과 인성이 완벽하게 표현된 모습을 바라볼 때, 성령님은 우리를 점점 더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키시며 한 단계의 영광에서 다음 단계의 영광에 이르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성화 사역입니다.

그리고 성화 사역과 함께, 이 은혜의 시대에 성령님이 하시는 세 번째 사역은 보호의 사역입니다. 성령님은 마지막 사역인 영화의 사역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십니다. 성령님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처럼, 또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모습 그대로 살리실 것입니다.

저는 제 삶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에 대해 생각합니다. 거듭나게 하시고, 성화되게 하시며, 미래의 영광을 위해 저를 보호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서 말이죠. 얼마나 복된 사역입니까.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기막힌 모순에 한탄합니다. 정말 기막힌 모순입니다. 오순절, 은사주의 운동가들은 성경에 명확히 계시되어 있는 너무나도 소중한 성령님의 이러한 사역을 부인하면서 스스로 성령 충만한 상태라고 주장합니다. 자기들이 성령님에 대해 어떤 독점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에게는 없는 성령님과의 특별한 경험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도 성령님이 믿는 자의 삶에서 행하시는 사역은 부인합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거듭남의 사역을 부인합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죄와 허물로 죽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위로부터, 성령님을 통해서 거듭나야 하며,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지 육신의 뜻이나 사람의 뜻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바람처럼 자신이 원하시는 곳에 임하셔서 원하시는 대로 행하시며 원하시는 자에게 역사하십니다. 이는 주권적이고 강력한 신성한 사역입니다.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은 이것이 협력적 사역이라고 믿게 하려 합니다. 즉, 성령님이 관여하시는 것은 맞지만 죄인 스스로가 성령님과 협력하여 자신에게 생명을 가져올 단계를 밟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게 하려 합니다. 또한 성화하시는 성령님의 강력한 사역을 부인합니다. 성령님의 내적인 역사, 즉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완전케 하시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거룩함에 대한 사랑, 의에 대한 사랑, 정결함에 대한 사랑을 키우시는 일에는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이보다는 외적인 일에 훨씬 더 관심이 많죠.

이 운동은 성결 운동이라고 불리지만 실제로는 성결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 운동이라고 불리지만 실제로는 성령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성령님의 진정한 사역인 내적 성결과 정결에는 거의 관심이 없고 오로지 외적 현상에만 관심을 둡니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외적 현상들은 성령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소위 기적, 방언, 쓰러짐, 음성을 듣는 것, 개처럼 짖는 것, 통제할 수 없이 웃는 것, 물질적인 번영, 세속적인 성공, 이런 것들 말입니다. 이처럼 은사주의 운동은 성화와는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에, 스캔들, 성적 문제, 탐욕, 부패, 왜곡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운동의 역사를 조금만 읽어봐도 꽤 흥미롭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종교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마 잘 모르실 겁니다. 바로 오순절주의입니다. 오순절주의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종교입니다. 1900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1901년 캔자스 주 토피카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뭔가를 시작했습니다. 1906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5억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1900년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지금은 5억 명이 되었습니다. 이 세력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통적 오순절주의, 신오순절주의, 1960년대 이후의 은사주의 운동이죠. 사실 이 모두가 섞여 있습니다.

이 운동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이 복음에서 성령 세례로 넘어갔습니다. 성경에서 경험으로, 잘못된 신학에 기반한 잘못된 경험으로 옮겨갔습니다. 그 결과 예배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서 단순히 감정적 고조를 유도하는 예배로 급격히 바뀌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성경과 설교를 지루하게 느끼자 설교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건전한 교리도 제거되어야 했는데, 이 운동이 건전한 교리의 면밀한 조사 아래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과 건전한 교리를 설교하는 자리에 광적이고 감정적으로 고조된 음악과 조작된 감정들이 들어섰습니다. 진리가 거짓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심판입니다. 그 자체로 심판입니다.

이들로 인해 성령님의 사역은 완전히 왜곡되었습니다. 기독교를 본질적으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바로 로마 가톨릭, 개신교, 그리고 오순절주의입니다. 저는 수년간 로마 가톨릭의 오류를 다뤘습니다. 상대적으로 오순절주의의 오류는 훨씬 적게 다뤘는데, 오순절주의자들이 우리가 분열을 조장한다고 비난하며 위협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일부는 침묵하기도 했죠.

저는 저희 교회나 제 개인적인 의견 때문에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을 위해서 진리를 수호하려고 합니다. 물론 성령님께 수호자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성령님은 우리가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지 않고, 소멸하지 않고, 모욕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성령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시편 기자가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라고 외쳤을 때의 심정을 느낍니다. 성령님이 모욕당하실 때 저는 그 고통을 함께 느낍니다. 마치 성령님을 모욕하는 것이 유행이 된 것 같습니다.

자, 이제부터 탄식하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의 진정한 사역을 살펴보겠습니다. 정말 놀라운 말씀이죠. 특히 26절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 본문은 성경의 위대한 보물 중 하나입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최종적인 영광으로 이끄는 은혜의 여정에서 어떻게 우리를 도우시고 보호하시는지를 설명합니다. 이 구절은 은사주의자들이 신약에서 가장 많이 남용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치 제 성경책이 피를 흘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만큼 많이 상처받았기 때문이죠. 은사주의자들은 이 “말할 수 없는 탄식”이 방언을 지지하는 본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기도하는 방법을 모를 때 이해할 수 없는 말인 방언으로 기도를 시작하라는 뜻이며,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성령이 하시는 것이라고 믿게 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곧 보시겠지만,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그런 게 아닙니다. 본문의 실제 의미와 완전히 동떨어진 해석입니다.

이제 문맥을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이와 같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스러운 나타남을 기다리며 탄식하는 것과 같이, 우리 자신이 양자됨, 즉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탄식하는 것과 같이 성령님도 탄식하신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피조물의 탄식, 믿는 자의 탄식을 살펴봤고, 이제 성령의 탄식을 보겠습니다. 이 모든 탄식은 우리의 미래 영광을 향한 것입니다. 피조물이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원하는 것, 믿는 자들이 자신이 영광스럽게 되기를 원하는 것, 이 두 가지만으로는 영광을 반드시 보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가장 중요한 탄식, 즉 우리의 미래 영광을 위한 성령님의 탄식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탄식하십니다.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성령님은 자신이 거하시는 사람들의 삶에 남아있는 죄의 짐과 무게라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깊이 관여하십니다. 우리가 가진 열망, 즉 아직 속량받지 못한 몸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완전한 구원과 완전한 양자됨, 그리고 완전한 의로 완성되고자 하는 열망과 하나가 되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영원한 영광은 성령님의 탄식하시는 중보로 인해 보장됩니다.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죠. 26절로 돌아가 보면,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있습니다. 23절에서 보듯이 우리는 속으로 탄식합니다. 미래의 영광에 대한 보증금, 즉 첫 열매를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죄 때문에 생기는 연약함 아래에서 탄식합니다. 성령님은 이러한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여기서 연약함이란 기도가 약하거나 기도 생활이 나약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 안에 남아있는 죄성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쇠약해진 상태를 뜻합니다. 타락한 존재의 필연적인 연약함입니다. 포괄적인 단어입니다. 우리의 죄성이 너무나 무거운 큰 짐이 되어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조차 모릅니다. 대처할 전략이 없습니다. 우리의 죄 가운데서, 그리고 우리의 고통 가운데서 너무나 무력한 나머지 타락한 죄성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자신의 영혼을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얼마 전에 한 유명한 은사주의 신학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성령님이 매우 강력하시다고 믿지만,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자유 의지로 악하게 살기로 선택한다면 성령님의 인치심은 깨질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천국에서 쫓겨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배우자에게 충실할 수 없다면 주님께도 충실할 수 없을 것이며, 심지어 천국에 들어간 후에도 주님께 충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탄과 천사들이 쫓겨났던 것처럼 우리도 천국에서 쫓겨날 수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구원이 그렇게 불안정하다고요? 우리가 이생에서 충실할 수 없고 천국에서도 충실할 수 없으니 쫓겨날 수도 있다고요? 이는 성령님의 보호하시는 사역에 대한 성경 말씀을 그야말로 완전히 무시하는 것입니다.

간략히 말씀드리죠. 만일 구원이 잃을 수 있는 것이라면 여러분은 잃게 될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제가 구원을 지키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저는 전혀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제게는 그런 힘이 없습니다. 저는 심지어 어떻게 제 자신을 무장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너무나 약합니다. 제 자신의 힘으로 지킬 수 없습니다. 제 자신의 기도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물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대로 기도하지만,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저 혼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는 누가복음 22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실패를 겪기 전에 예수님이 먼저 경고를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말하자면 “사탄이 너를 노리고 있다"라고 하신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이 시험에 빠지기 전에 베드로의 태도는 어땠습니까?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자신감에 가득차 있었죠. 베드로는 자신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자신의 약점의 깊은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마주하게 될 힘을 이해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믿음으로 보호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의지로 보호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기 때문에 보호받았습니다. 이것이 베드로를 지켜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이며, 예수님의 대제사장 사역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항상 중보하십니다.

여러분이 영광에 이를 수 있는 이유, 구원을 잃지 않고 안전할 수 있는 이유는 하늘에 계신 대제사장이 계속해서 중보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안에는 중보하시는 두 번째 제사장이 살고 계십니다. 바로 성령님이죠. 우리를 지키시려면 얼마나 많은 능력이 필요할까요? 믿는 자를 은혜에서 영광으로 이끄시는 데 얼마나 많은 신성한 능력이 필요할까요? 이 신성한 능력에는 아들과 성령의 지속적이며 영원히 끊임없는 중보가 포함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의 힘으로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육신의 힘으로는 결코 영광스러운 부활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의 죄성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실패하지 않는 믿음을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그리스도와 성령에 의해 유지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전 그레이스가 찬양했듯이, 우리에게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는 겁니다. 욥을 보십시오.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의 믿음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26절에서 성령님은 어떻게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까?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말이죠.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여기서 ‘간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렌튕카노(Huperentunchano)’는 매우 강한 의미의 복합어로, 자신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매우 큰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조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나이아가라 폭포를 향해 떠내려가는 사람 같은 상황입니다. 아주 극단적인 상황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넘어서고 우리보다 훨씬 더 큰 통찰력과 훨씬 더 큰 힘을 가진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바로 성령님이죠. 저는 또 본문에 나오는 대명사 '아우토(auto)'를 좋아합니다. 성령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성령님이 위임하신 누군가가 아닌 성령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도 성령님이시고, 우리를 점점 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시며, 우리를 지키시는 분도 성령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하시나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신음소리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 혹은 방언으로 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황홀경에 빠져서 나오는 언어가 아닙니다. 누군가가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성령님이 들리지 않는 소리로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본문은 “말할 수 없는”이라고 말합니다. 이 탄식은 사람의 탄식이 아니라 성령님의 탄식입니다. 장엄할 정도로 아름다운 것은 성령님이 모든 믿는 자의 영화를 위해 마음 아파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나타남을 위한 이 아픈, 연민 어린 갈망으로 인해 성령님은 삼위일체의 대화에서 믿는 자들을 지켜달라고 아버지께 조용히 간구하십니다. 우리가 보호받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호받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고, 하나님께서 아들과 성령의 사역을 통해 말씀이 실현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육신을 이해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시며, 유혹을 이해하십니다. 결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이끌지 않으십니다, 그렇죠?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하나님은 항상 피할 길을 내십니다. 요한복음 18장은 이에 대한 예시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이 체포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제자들 중에서 아무도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배반할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 놓이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기록된 사실이 아니라 보장된 사실입니다. 아들과 성령의 지속적인 중보 사역을 통해 보장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최종적인 영광을 간절히 바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저는 호세아 11장을 읽다가 8절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아시다시피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성령님의 탄식에는 내용이 있습니다. 의미가 있습니다. 목적이 있습니다. 모든 탄식은 삼위일체 내에서 언어를 초월하는 방식으로 소통되어 천국에서 여러분의 자리를 보장합니다. 성령님은 누구에게 말씀하고 계신 걸까요? 27절로 돌아가 봅시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 분은 누구인가요?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누구인가요? 사무엘상 16장 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열왕기상 8장 39절입니다. “오직 주만이 모든 인자의 마음을 아시나이다.” 역대상 28장 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마음을 감찰하시며 모든 의도를 아시나이다"라고 합니다. 시편 139편에서는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시나이다. 내가 앉고 일어섬을 주께서 아시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전체가 이를 설명합니다. 잠언 15장 11절에서는 "스올과 아바돈도 여호와 앞에 드러나 있느니라"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였으니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대답은 "나는 여호와라 마음을 살피며"입니다. 사도행전 1장 24절에서는 "주여, 주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십니다"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 앞에 숨겨진 피조물이 없으며, 모든 것이 그 앞에 드러나 있고 벌거벗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자신의 영원하고 거룩한 마음에서 아버지와 그의 마음으로의 말 없는 소통 속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분, 하나님은 성령의 생각을 아십니다. 완벽한 교제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것인가요?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구속받은 인류를 천국으로 데려가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목적입니까? 하나님의 계획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 계획하셨습니다. 아들께서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보존하시고 보호하십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우리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의 영광을 계획하셨고, 아들께서 우리에게 영광을 주셨으며, 성령께서 우리의 영광을 보호하십니다. 정말 놀라운 구절입니다.

살아가면서 여러분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외적인 것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하실 겁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 안에 있는 내적인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하나님이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기에 결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성령님의 지속적인 중보 사역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인생의 모든 우여곡절과 고난과 문제들 속에서, 성령님이 끊임없이 여러분을 위해 중보하시며,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의 마음과 완벽한 교제 속에서 조용히 중보하신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에게는 여러분을 향한 모든 고소에 대항하는 변호인이 있다는 사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우편에 서 계시면서 여러분의 모든 죄에 대한 대가를 완전히 치르신 분으로서 여러분을 변호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영광에 이르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무도 여러분을 정죄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28절의 진리에 이르게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28절로 이끕니다. 28절은 널리 알려진 구절입니다. 교회에 어느 정도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만큼 말이죠. 그런데 이 구절은 따로 떼어서 보기보다는 문맥 안에서 보아야 풍성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반드시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이는 뒤에 나오는 내용과 순차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이유는 성령님의 탄식하시는 중보 사역 덕분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를 영원한 영광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성령님의 중보 사역 덕분입니다. 성령님의 중보 사역과 하나님의 신성한 목적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성령님의 간구에 응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 일은 단절되어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말씀드리자면, 지금 이 모든 것을 다룰 순 없기 때문에, 예전에 28절에 대해 이미 다룬 적이 있죠. 이 구절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것이 참 많습니다. 끝없이 확장 가능한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선’이란 영원한 영광이라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은 영원한 영광입니다. 왜냐하면 30절에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말하고, 19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 21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을 말하듯이, 영원한 영광이 모든 것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제입니다. 24절과 25절에서는 우리의 ‘소망’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은 우리의 영원한 영광입니다.

요점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그리스도의 이루심, 그리고 성령님의 중보 사역을 통한 보호하심으로 인해,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우리의 최종적이고 영원하며 궁극적인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선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죠. 물론 여러분은 이로부터 좋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겠죠. 주님께 더 가까이 이끌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더 깊어질 수도 있고, 여러분을 더 강하게 만들 수도 있으며, 인내심을 길러줄 수도 있습니다. 완전해지고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상담해 주고 힘을 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같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위로로 다른 이들을 위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놀라운 현실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선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선은 참된 믿는 자들의 영화라는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선입니다. 우리는 그 최종적인 선, 즉 가장 좋은 것을 향해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복되신 성령님의 중보 사역에 대한 응답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느니라.” 그렇다면 어디까지 지켜주실까요? 바로 여기에 보호되는 범위가 나옵니다. “모든 것이.” 모든 것, 모든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궁극적인 선, 우리의 영화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정죄 받지 않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 적극적으로 표현된 문장입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습니다. “모든 것,” “판토스(pantos)”, 그 성질이 무엇이든, 그 수가 얼마나 되든, 그 범위가 어떠하든,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에서 여전히 구속되지 않은 인간성에 갇혀 저주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닥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든, 그 모든 일, 일어나는 모든 일,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우리의 최종적인 선을 위해 합력하게 하십니다.

“합력하여”는 헬라어로 ‘쉬넬게이’(sunergei)인데, 여기에서 ‘시너지’라는 영어 단어가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시너지를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이를 섭리라고 할 수 있죠. 하나님의 섭리 말입니다. 모든 것이 그 자체로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니며, 모든 것이 반드시 우리의 삶에서 선을 만들어내기 위해 합력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살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삶이 언제나 좋지만은 않습니다. 병에 걸리거나 직장이나 집이나 친구를 비롯한 많은 것들을 잃을 수도 있죠. 하지만 결국에는 선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궁극적인 선, 영원한 영광이 실현될 것입니다. 이것이 여기서 말하는 선입니다. 24절과 25절에 언급된 소망, 우리의 영원한 소망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여기서의 선은 도덕적 의미에서의 ‘선’입니다. 보기 좋다는 뜻인 ‘칼로스(kalos)’가 아닙니다. 이 선은 ‘아가도스(agathos)’입니다. 도덕적 의미에서의 선입니다. 진정한 선, 실제적인 선, 궁극적인 선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를 좋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삶은 좋은 일들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복을 받았습니다. 좋은 일들이 우리의 선을 위해 합력합니다. 하지만 나쁜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쁜 일들도 우리의 선을 위해 합력합니다. 고난, 유혹과의 싸움, 심지어 죄까지도 말이죠.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붙들고 계시면서 성령님의 중보 사역에 응답하셔서 우리의 최종적인 선을 위해 합력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안전한 범위가 이 정도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의 영원한 선을 위해 합력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잃을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안전의 범위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보호를 받습니까? 이 안전을 보장받는 약속의 수혜자는 간단히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27절입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그러니까 “성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의로 덮인 거룩한 자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자들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28절은 이를 더 자세히 정의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혹시 이런 질문을 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기도를 한다거나 교회에 다닌다거나 하는 것 말고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어떻게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인지 알 수 있을까요?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왜 하나님을 사랑할까요?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유효한 부르심입니다. 유효한 부르심. 마태복음 22장에서 주님이 사람들을 초대하시는 것과 같은 초대가 아닙니다. 유효한 부르심입니다. 절대적인 부르심입니다. 30절입니다.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영적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신학자들이 말하는 유효한 부르심입니다. 그렇게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 성령의 능력으로 생명으로, 구원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로 묘사됩니다.

어떻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또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이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여인처럼 많이 용서받았기 때문에 많이 사랑합니다. 구약의 위대한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참된 믿는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로 묘사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위엄있는 영광을 묵상하는 사랑입니다. 예배하기를,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갈망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과의 교제를 추구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이들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친밀한 교제를 추구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더 알고자 추구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에 민감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죄를 슬퍼하고 의를 기뻐하는 사랑입니다. 세상을 거부하는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갈망하는 사랑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사랑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어떻게 한다고요?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참된 믿는 자들에게 이 약속은 놀라운 약속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간구를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결국에는 영원한 선과 영원한 영광을 위해 합력하도록 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저는 바로 지금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성령님을 존중하고 예배하며 사랑하고 성령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성령님의 거룩한 이름을 모욕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그만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많은 말을 합니다. 요즘 시대에는 특히 아버지와 아들을 높여드리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죠.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사역을 높이는 것은 아무리 많이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가운데서, 제가 보기에는, 성령님이 가려져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동등하게 하나님이시며 동등하게 높임을 받으시고 찬송받으셔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확신입니다.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가 알거니와.” 아마도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압니다. 우리의 안전에 대한 확실성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가 어떻게 알까요? 우리가 구속받은 백성을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희생을 통해 이루셨고, 성령께서는 이 계획을 끝까지 실행하십니다.

29절과 30절은 다음 시간에 보겠습니다. 아주 심오한 구절이죠. 지금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보통 제가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본 후에 기도를 하면 여러분 모두가 그냥 벌떡 일어나서 뛰쳐나갑니다. 저는 여러분이 어디로 가시는지 모릅니다. 뭐가 그렇게 급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깊은 죄책감 때문인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가장 많이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신다고 믿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때로는 그냥 흐지부지 끝나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특별히 알려드리고 싶은 것은 예배 끝에 마지막 기도를 드린 후에도 영적으로 도움이 필요하신 분들이 있다면 기도실이 열려 있으니 방문해보시라는 겁니다. 또 새가족실도 새가족 등록, 세례 정보 등을 위해 열려 있습니다. 모두 알고 계시죠?

하지만 무엇보다 꼭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마지막 기도 후에 그대로 앉아 계시면서 조용히 묵상하듯이 오늘 말씀에 대해 생각해 보시라는 겁니다. 스티브가 약 30초 정도 잔잔한 찬양을 연주하는 동안에 묵상해 보십시오. 개인적으로 묵상하는 시간을 잠시 갖도록 하십시오. 아시겠죠? 그리고 스티브가 연주를 멈추면 그때 나가시면 됩니다. 그렇게 해보십시오. 오늘 예배는 그렇게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자비로운 은혜의 장엄함, 우리에게 주신 이 위대한 자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하늘에서 간구하시는 그리스도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광을 위해 이곳에서 간구하시는 성령님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성령님의 간구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안전합니다. 십자가 사역으로 우리 구속의 대가를 치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성화시키시며, 보호하시고, 언젠가 영화롭게 하실 복되신 성령님께도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든 면에서 높여드리길 원합니다. 우리 같은 연약한 인간이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진리를 드러내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양자 삼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영광의 날까지 탄식하며, 그날에 주님 발 앞에 엎드려 온전한 의로움으로 예배할 수 있기를 기다립니다.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날을 기대하며 주님께 순종함으로 이 은혜의 여정을 바칩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과 높임을 받으시며 사람들을 주께로 이끌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This sermon series includes the following messages:

Please contact the publisher to obtain copies of this resource.

Publisher Information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Welcome!

Enter your email address and we will send you instructions on how to reset your password.

Back to Log In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Minimize
View Wishlist

Cart

Cart is empty.

Subject to Import Tax

Please be aware that these items are sent out from our office in the UK. Since the UK is now no longer a member of the EU, you may be charged an import tax on this item by the customs authorities in your country of residence, which is beyond our control.

Because we don’t want you to incur expenditure for which you are not prepared, could you please confirm whether you are willing to pay this charge, if necessary?

ECFA Accredited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Back to Cart

Checkout as:

Not ? Log out

Log in to speed up the checkout process.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Minimiz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