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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 로마서 8장을 보겠습니다. 오늘은 29절과 30절 두 절만 살펴볼 겁니다. 하지만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28절부터 30절까지 읽어드리겠습니다. 이 구절들은 실제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미 지난 시간에 28절과 29절의 후반부를 대부분 다뤘지만 다시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부터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다시 한번 큰 그림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너무 장황하게 설명하고 싶지는 않지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성령님의 은혜롭고 강력하며 놀라운 역사는 전심을 다해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예배를 드리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예배는 믿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참된 예배자를 찾고 계시며, 사도 바울에 따르면 우리는 성령 안에서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먼저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예배의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어떻게 예배드려야 할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과 위대한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나 교회에서나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 어떻게 예배드려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죠.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승천, 중보 사역, 그리고 재림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일부 교회, 특히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성령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에 대한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예배와 마찬가지로 성령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얼마나 참되고 정확하게 알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런데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합당한 예배를 받으셔야 할 성령님의 사역을 자세히 알려드리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령님도 예수님이나 하나님과 동등한 주권을 갖고 계시다는 겁니다. 성령님도 삼위일체의 다른 구성원과 동등한 주권과 권위를 갖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께 순종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님께도 순종해야 합니다. 아들과 아버지를 높여드려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님도 높여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 일반적인 복음주의 교회는 성령님의 위격과 사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성령님께 드리는 예배가 혼란과 무지로 가득해져 버렸습니다. 20세기 초부터 화합과 포용과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복음주의 교회는 이처럼 광범위하게 퍼진 오류를 바로잡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매우 심각한 일이라고 할 수 있죠. 반드시 드러내고 바로잡아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순절/은사주의 운동에서는 무슨 말을 하든지 성령님을 언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을 주권적인 하나님으로 보지 않습니다. 신자를 다스리시고 명령하시는 주권적인 영, 우리가 복종해야 하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할 분으로 인식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인격적인 일종의 형이상학적 힘이나 능력으로 제시되죠. 이 능력을 신자를 섬기고, 신자의 의지와 소원과 욕구와 말, 심지어 명령에 순종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개인의 욕망, 소원, 야망, 건강과 부와 번영에 대한 욕구, 신비한 경험과 감정에 대한 갈망을 성령님의 역사로 여깁니다. 또 성령님이 신자가 요구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역사하신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은사주의 운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베니 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 달라고 말해서는 절대 안 된다.” 또 이렇게 말하기도 했죠. “성령의 활동은 내 말에 달려 있다. 내가 말하기 전까지 성령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베니 힌 자신이 주권을 갖고 있고 성령님은 힌의 말에 반응하여 움직이는 형이상학적 능력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관점은 ‘믿음의 말씀’ 운동에서부터 긍정적으로 말하기만 하면 원하는대로 이루어진다는 조엘 오스틴 같은 번영 신학 설교자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은 케네스 해긴입니다. 해긴은 이 아이디어를 E. W. 케년에게서 훔쳤고, 케년은 이를 크리스천 사이언스 형이상학에서 왜곡시켰습니다. 어쨌거나 이들은 성령님을 어떤 비인격적인 능력에 불과하다고 여깁니다.

베니 힌의 주장에 따르면 성령의 기름부음이 자신에게 임하는 때는 이미 죽은 두 명의 이단 설교자인 에이미 셈플 맥퍼슨과 캐서린 쿨만의 무덤에 갈 때랍니다. 이들의 무덤 근처에 가면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한답니다. 이 기름부름이 너무나 강력한 나머지 외투를 벗어서 자기 몸에 문지르면 외투로 들어가는데, 이 기름부음이 들어간 외투를 공중에 휘두르면서 “쾅, 쾅, 쾅” 이렇게 외치면 대규모 청중이 모두 쓰러진답니다. 성령이라고 불리는 능력을 휘두르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성령에 취해 쓰러지는 거랍니다. 이렇게 성령을 휘두르면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쓰러지기도 하고 단체로 쓰러지기도 한답니다. 힌과 같은 복음전도자들은 성령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어서 수요일 밤 7시 30분에 특정 극장에 나타나도록 불러내서 자기들 뜻대로 휘두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형이상학입니다. 성령님을 신비한 능력으로 보고, 우주에 형이상학적으로 작용하는 특정 법칙들이 있어서 그 법칙들을 활용하면 성령이 능력으로 작동한다는 생각입니다. 성령님의 이름이 거짓 교사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 자리에 어떤 영이 존재할지는 모르지만 성령님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이유는 마치 정식 설교자처럼 보이게 해서 유명세와 부를 얻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거짓 교사는 명성을 얻고 성령님은 모욕을 당하십니다.

이게 얼마나 심각한 일일까요? 출애굽기 20장에 십계명이 나오는데 그 중 하나를 읽겠습니다. 7절입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을 형이상학적으로 다루는 은사주의자들이 바로 이런 행위를 하고 있는 겁니다. 성령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이죠. 계속 읽습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물론 이런 사람들을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제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들은 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지금도 속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 벌이 하루라도 빨리 내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성경은 성령님께 예수님과 하나님께 부여된 모든 속성을 부여합니다. 성령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모든 믿는 자들을 다스리는 주권자이십니다. 우리에게 순종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뜻을 이루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작동시키는 어떤 형이상학적 법칙에 반응해서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는 말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명령을 내리기를 기다리는 어떤 능력이 아닙니다. 성령은 믿는 자를 다스리는 주권자이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님의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 안에서 걷고, 성령님 안에서 살며, 성령님께 순종하고,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위에 계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분이십니다.

이제 다시 로마서 8장으로 돌아가서 성령님의 진정한 사역을 살펴보겠습니다. 믿는 자, 신자 안에서 이루어지는 은혜로운 사역의 요소를 다루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큰 그림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영원 전부터 구원을 계획하시고 시작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구원을 계획하셨고, 아들은 십자가에서 이루셨으며 세상에서의 삶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완벽한 인간성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셨습니다. 구원받고 완전히 성화되어 영화롭게 된 사람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구원을 시작하셨고, 아들은 십자가에서 이를 이루시고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실행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회개로 이끄십니다.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책망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며, 믿을 수 있도록 생명과 이해력을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입니다. 우리를 성화되게 하시며 보호하시는 분, 즉 우리의 미래의 영광을 보장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시며,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분도 성령님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예수님을 살리신 것처럼 우리도 능력으로 살리실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구원의 모든 역사를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그리스도가 이루시고 보이셨으며, 성령님이 적용하시고 실행하십니다. 다른 말로 설명한다면 아버지께서 택하신 백성을 구원하고자 작정하셨습니다. 아들께서는 그 구원이 가능하도록 희생제물로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이 구원을 적용하십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시고 거듭남과 성화로 이끄시며 언젠가는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님은 신자를 거듭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보호하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진정한 역사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로마서 8장을 통해서 성령님의 사역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제 28절부터 30절을 보겠습니다. 17절부터 나오는 성령님의 특정한 사역을 살펴보고 있는데, 바로 우리를 보호하시는 사역입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을 다뤘습니다. 성화 사역, 즉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분리시키시고, 율법을 성취할 수 있게 하시며, 우리의 본성을 변화시켜 의롭게 행하도록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하시고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는 것에 대해서도 다뤘습니다. 이 모두는 성화와 정체성,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사역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영원한 영광을 보장하시고 확보하시는 사역입니다. 이는 17절부터 30절까지 이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의 영원한 구원, 천국에서의 자리를 확보하시는 사역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제가 의도적으로 베드로전서를 읽어드린 이유는 우리가 얻을 미래의 유업이 보호받고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의 유업은 하나님의 능력, 즉 성령님에 의해 보호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는데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보호 사역입니다. 성령님이 약속의 성령이라고 불리시는 이유입니다. 성령님은 보증금, 계약금, 약혼 반지, 여러분을 최종적인 영광으로 인도할 하나님의 인이십니다.

그러니까 17절부터는 주제가 거듭남과 성화에서 영광으로 옮겨갑니다. 17절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18절은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대해 말합니다. 21절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을 언급합니다. 우리는 모두 미래를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24절에서 우리는 영광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됩니다. 다시 25절에서 소망이 언급되고, 30절까지 계속되어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는 말씀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17절부터 30절까지의 주제는 우리가 미래에 받을 영광입니다. 우리를 그 미래의 영광으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6절과 27절은 성령님이 정말 놀라운 방식으로 역사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것이죠. 성령님은 우리의 중보자입니다. 성령님은 삼위일체 내에서 말없이, 교제로 계속해서 아버지 앞에 나아가십니다. 이는 성령님이 언어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아버지께 말씀하시는 겁니다.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심오합니다. 인간의 언어로는 이 교제가 제한될 겁니다. 성령님은 말없이 소통하시며, 아버지의 뜻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아버지와 교제하십니다. 27절을 보면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시며, 마음을 살피시는 이, 즉 하나님은 성령님의 생각을 아십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성령님이 아시는 아버지의 계획을 보게 되고,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계획의 틀 안에서 중보하시며, 따라서 성령님의 그 놀라운 중보 사역을 통해 우리는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영광을 얻도록 탄식하고 계십니다. 19절부터 22절까지는 피조물이 탄식합니다. 23절부터 25절에서는 믿는 자들이 탄식합니다. 이 두 가지 탄식은 효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탄식은 효력 있는 탄식입니다. 우리를 최종적인 영광으로 인도하는 강력한 탄식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의 이러한 중보 사역으로 인해 아버지께서, 28절이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부르셔서 영원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미래의 영광,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스러운 나타남으로 그림이 바뀌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렇죠? 이제 이러한 사실이 우리를 29절과 30절로 이끕니다. 간단한 요약입니다. 우리는 이미 29절에서 구원의 목적을 살펴보았습니다. 가볍게 다시 짚어보겠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차적인 목적, 궁극적인 목적 바로 앞의 목적입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차적인 목적, 즉 구속의 역사를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부차적인 목적은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구속의 역사는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위해 신부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시고, 그 아들을 완벽하게 사랑하시며, 아들에게 사랑의 선물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 선물은 사랑스러운 신부가 될 구속받은 인류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기쁨에 찬 신부입니다. 그래서 구속의 역사 전체를 통해 아버지는 신부를 이끌고 계십니다. 신부를 이끄십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서도 새 예루살렘을 신부의 도시라고 부를 것입니다.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을 것입니다. 교회는 신부가 될 것입니다. 구속받은 자들이 신부이기 때문이죠. 여호와의 아내로 일컬어진 옛 이스라엘의 신자들 역시 아들의 신부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신부를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신부를 얻기 위해서 아들이 치러야 할 대가가 있었습니다. 고대 관습처럼 말이죠. 신랑은 신부를 맞이할 때 대가를 지불해야 했는데, 아들 예수님이 치러야 할 대가는 자신의 생명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말처럼 은이나 금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주고자 하신 신부의 값을 치르기 위한 대가는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바치실 때 예수님의 혈관에 흐르던 보배로운 피, 보혈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천국은 신부의 도시로 모여든 신부들이 모인 곳이 될 것입니다. 신부가 완성되면 구속의 역사는 끝나고, 모든 신부는 아들 주위에 모일 것입니다. 신부들은 신랑 되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흠모하며, 섬기고, 예배할 것이며,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상을 닮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자세히 살펴봤으니 더 이상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이것은 부차적인 목적입니다. 그리고 29절의 주된 목적, 궁극적인 목적은 주 예수님이 많은 형제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그리스도의 탁월함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하실 것입니다.

구속사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시고, 아들에게 사랑의 선물로 신부를 주기로 결정하십니다. 이 신부는 아들을 섬기고, 흠모하며, 예배하고, 사랑하며, 그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이 영광은 신부들이 속량,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더 위대하게 나타날 겁니다. 결코 보여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모든 속성을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합당하지 않은 죄인들을 구속하셔야 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목적입니다.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께 모든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관을 주님의 보좌 앞에 드리며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다고 고백할 겁니다. 이것이 구원의 목적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가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실 겁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진정한 결말은 이렇습니다. 신부가 그리스도의 영광과 존귀를 위해 바쳐진 후, 그리스도는 자신과 신부를 모두 아버지께 돌려드리는 상호적 사랑을 보여주실 겁니다. 우리가 이 과정에 포함되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결말을 향한 과정은 어떻게 될까요? 구원의 부차적인 목적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되는 것이고, 주된 목적은 그리스도가 으뜸이 되고 높임을 받으시는 겁니다. 그 목적에 도달하는 과정이 29절과 30절에 나와 있습니다. 혹시 개혁신학이나 은혜의 교리, 또는 칼빈주의가 정확히 무엇인지 궁금하시다면, 간단히 말해서, 바로 여기에 나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구절에 은혜의 교리, 개혁주의 구원론의 본질, 칼빈주의의 핵심이 가장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구원의 측면에서 중요한 본질이 모두 하나의 순서, 하나의 과정으로 묶여 있습니다.

29절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30절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지, 예정, 소명, 칭의, 영화. 이 다섯 가지는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 목적을 구성하는 근본 요소입니다.

정말 놀라운 점은 성령님이 이 다섯 가지를 함께 언급하시면서도 단 두 개의 문장 안에 간결하게 표현하셨다는 겁니다. 덧붙이자면 이 다섯 가지에 대해 수백만 장에 달하는 글이 쓰여졌습니다. 이제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을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그 과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물론 하나님께는 과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완성된 상태로 완전히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순서대로 차근차근 이해할 필요가 있고 실제로 두 구절에 그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구원은 어디서 시작됩니까? 모든 것이 시작되는 가장 근본적인 지점은 어디일까요? 29절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어떤 이들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 이게 핵심이군요. 하나님이 미리 아셨다는 거죠.” 하나님이 모든 일을 아시기 때문에, 미래를 내다보시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 의지로 어떻게 행할지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미리 아신다는 말이 이런 뜻일까요? 하나님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셨다는 것일까요? 자, 말씀드리자면, 물론 하나님은 확실히 미래를 아십니다. 시작부터 끝을 아십니다.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 일을 아십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예지력을 갖고 계십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완전히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 구절이 그런 뜻일까요? 하나님이 사람들이 무엇을 할지 미리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음, 이 사람들은 믿을 것이고 저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나는 누가 믿을지 알고 있으니 믿을 사람을 택하겠다.”

글쎄요, 이런 주장에 몇 가지로 답할 수 있습니다. 우선, 그렇게 되면 ‘택하심’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무것도 택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선택 교리를 잊어버리셔도 됩니다. 하나님이 아무것도 택하시지 않으셨으니까요. 그렇다면 반응 교리라고 해야겠죠? 하나님의 반응 교리를 전하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인간 주권의 교리를 전하고 싶으실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타락을 극복했을까? 하나님이 미래에 보신 그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타락과 죽음, 눈멂, 어둠을 극복했을까요? 그리고 또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미래를 보시고 사람들이 복음을 믿기로 선택하지 않아 결국 지옥에 갈 것을 아셨다면, 애초에 왜 창조하셨을까요? 보시다시피, 사람들이 하나님이 단순히 일어날 일을 아시고 반응하셨다는 생각을 하는 유일한 이유는 일어나는 일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묻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나쁜 평판, 즉 사람들이 지옥에 가게 내버려두시는 것에 대한 책임에서 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단지 사람들이 하는 일에 반응하시는 것뿐이라고 주장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아무도 창조되지 않았을 때,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 사람들을 창조하셨을까요? 아니면 더 어려운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왜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렇게 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창조하셨을까요? 결국 어떻게 해도 하나님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리 아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미리 아심, 예지는 무슨 뜻일까요? 단순히 하나님이 일어날 일을 아시고 그에 반응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왜일까요?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6장 끝부분인 65절에서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모두 알고 계시죠? 마태복음 11장 27절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것이고, 아들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안다”라는 단어가 있죠? 이것이 첫 번째 열쇠입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아들이 계시하시고자 하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들에 대해 알고 있지 않나요? 우리에게는 아들에 대한 정보가 있어요. 거룩한 천사들에게도 있고, 마귀들에게도 있어요. 그런데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안다”라는 단어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렇죠?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천사들, 타락한 천사들, 심지어 사람들도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지만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요한복음 10장은 어떤가요? 이 구절도 같은 단어를 사용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4절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어떻게 안다는 걸까요? 예수님이 “내가 내 양을 안다”고 말씀하신 것이 단순히 “내가 내 양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까요? 마치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정보가 없다는 듯이 말이죠. 아모스 3장 2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을 알았나니.” 이스라엘만을 아셨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데 말입니다. 이스라엘만을 알았다니, 뭔가 다른 의미를 가진 것이 분명합니다. 요한복음 10장 2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놀랍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나는 그들을 안다. 어떤 종류의 앎입니까? 무슨 뜻일까요? 요한복음 17장 25절입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여기서 안다고 말하는 그 앎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도움이 되는 비유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창세기 4장입니다. 지금 펴지는 마십시오. 창세기 4장을 원어로 보면 이렇습니다. “가인이 그의 아내를 알았고 그녀가 아들을 낳았다.” 가인이 그의 아내를 알았다. 성경의 아름답고 완곡한 표현으로 육체적인 앎을 의미합니다.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뜻합니다. 가브리엘이 나타나 아기를 가질 것이라고 마리아에게 말했을 때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녀가 요셉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요셉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앎은 어떤 앎입니까? 친밀한 앎입니다. 호세아 13장 5절입니다.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알았거늘.” 무슨 뜻일까요? 내가 너에게 내 사랑을 두었다는 뜻입니다. 내가 광야에서 너와 사랑의 관계를 맺었다는 뜻입니다.

이 앎은 신약성경에도 자주 나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태복음 7장입니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뭐라고 하신다고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그들이 누구인지 몰랐다는 뜻일까요? 물론 예수님은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다.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내가 너희와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앎이죠.

몇 구절을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지가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분 스스로 답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또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도와줄 수도 있을 겁니다. 고린도전서 8장 3절입니다. 정말 간결합니다.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아시겠나요? 이게 전부입니다. 별표를 해 두십시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알아주십니다.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아신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아신다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친밀한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친밀한 사랑입니다. 바로 이것이 앎의 의미입니다. 왜 예지일까요? 이 사랑이 생겨나기 전에, 그 누구도 태어나기 전에 이미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지입니다. 미리 아셨다는 뜻이 이것입니다. 이것이 예정입니다. 일어나기 전에 이미 확립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9절은 구원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여기서 정말 마음에 드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구원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께 알려지는 것, 하나님이 아신 바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아신 바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러분의 존재를 아신다는 걸까요? 여러분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계시다는 걸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사랑의 관계를 맺었다는 의미입니다. 로마서 11장에서도, 주권적 선택에 대한 매우 중요한 장이죠, 11장의 시작 부분, 2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사랑하시기로 미리 정하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모세오경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왜 이스라엘일까요? 왜 이스라엘일까요? 리처드 울프가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죠. “하나님이 유대인을 택하시다니 참 이상하군요.” 왜 이스라엘일까요?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이것은 주권적이고 독립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지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에도 있죠.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구원 계획의 본질은 특정 사람들을 사랑하시기로 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단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3장에 나오는 것처럼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지입니다. 미리 정해진, 예정된, 미리 아신 사랑의 결단입니다.

방금 전에 베드로전서를 읽어드렸지만 전체 장을 읽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베드로전서 1장 2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계속 들어보십시오. 같은 장 19절과 2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미리 아심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이 그냥 앞을 내다보고 “저것 좀 봐. 예수는 결국 십자가에 달리게 될 거니까 뭔가를 해야겠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인가요? 그리스도가 창세 전,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미리 아신 바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이 제물로 드려지는 것을 하나님이 정하시고 확립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러분을 위해 이 마지막 시대, 말세에 나타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지가 작용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과거에 구원의 방식을 정하셨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방식이 이루어집니다.

미리 아심의 또 다른 예를 사도행전 2장 23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오순절에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사람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일을 이야기합니다. 동시에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계획에 따라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목해 보십시오. 베드로는 제가 방금 읽은 내용을 쓴 사람입니다. 이 설교를 한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예지, 미리 아심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믿지 않는 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하나님이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죽임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뜻’이라는 단어는 '불레(boulē)'입니다. 고대 헬라어에서 목적이나 모의를 의미합니다. ‘정하신’은 '호리조(horizō)'에서 유래된 것으로, 영어 단어 ‘호라이즌’, 즉 경계선이 여기서 유래되었습니다. 정하셨다는 것은 경계나 한계를 설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도에 따라 경계를 설정하셨습니다.

“정하신 뜻”은 다른 방식으로 번역하면 “운명 지어진 뜻”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운명 지어진 목적, 계획, 결정으로, 미리 정해지고 표시된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미리 아신 대로”를 덧붙입니다. 영어로는 '프로그노시스(prognosis)'입니다. 하나님의 정해진 뜻이란 특정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사랑의 관계를 맺으시기 위해 미리 뜻을 정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지입니다. 확립된 사실입니다.

로마서 8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을 통해 예지, 미리 아심을 이해해 보겠습니다. 나머지는 아까 알려드린 말씀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29절입니다, “미리 정하셨으니.” 미리 정하셨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끝, 운명을 의미합니다. 참고로, ‘미리 정하다’는 '프로오리조(proorizō)'입니다. 경계를 설정하는 좀더 강한 방법입니다. 최종 목적입니다. 우리가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많은 형제들 중에서 으뜸이 되실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영원한 과거에 특정 사람들과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맺기로 결정하고, 그 결정을 기반으로 미래의 최종 목적을 미리 정하셨습니다. 처음부터 끝을 정해두셨습니다. 우리의 이름은 창세 전부터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 8절과 17장 8절이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했던 모든 것은 처음부터 결정되었고 그 최종 목적까지 미리 정해졌습니다. 이것이 전체적인 그림입니다. 사도행전 4장 28절을 보면 하나님이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셨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4장 28절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대로 이루어질 겁니다.

그러니까 미리 아심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의미합니다.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리 정함, 예정은 그 선택의 결과, 즉 끝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셨습니다. 30절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이제 우리는 시간으로 들어갑니다. 인간 역사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에 대해 말하는 겁니다. 부르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초대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복음서에서 많은 사람들이 초대를 받았으니 가서 불러 오라고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런 부르심이 아닙니다. 다른 종류의 부르심입니다. 같은 문맥의 28절을 보면 하나님의 목적과 연결된 부르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신학자들이 말하는 유효한 부르심, 또는 강력한 부르심, 또는 제가 좋아하는 역사적인 표현인 저항할 수 없는 부르심입니다. 이것은 은혜로운 부르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효한 부르심입니다. 외적인 부르심이 아닙니다. 귀에 들리는 것을 거부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있는 그런 부르심이 아닙니다. 내적인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이 특별한 이유죠.

이 부르심은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부르심입니다. 그래서 종종 이렇게 표현됩니다. 로마서 1장 7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이 말씀이 모든 것을 연결해 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와의 사랑의 관계를 미리 정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내적으로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구원하시고, 구속하시는 부르심을 주신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서신서를 비롯한 복음서 이후에 기록된 성경에서 ‘부르심’이라는 개념은 항상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님의 구원 사역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부르심은 항상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목적과 연결된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구원하는 것이며,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부르십니다. 신약성경 시대에도 지금도 우리는 교회라고 불립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헬라어 단어 '에클레시아(ekklesia)'에서 유래된 것이며 이는 동사 '에크칼레오(ekkaleo)'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칼레오(kaleo)'는 부르다, '엑(ek)'는 ‘~로부터’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에크칼레오(ekkaleo)'는 우리가 세상, 죽음, 어둠, 무지로부터 불려 나왔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죠.

디모데후서 1장 9절보다 이를 더 잘 설명하는 말씀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하나님의 능력, 즉 하나님의 능력이신 성령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이는 거룩함으로의 부르심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변화입니다. 진정한 거듭남이며, 거룩함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궁극적인 거룩함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최종적인 완전함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영원한 영광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이 부르심은 복음을 통해 옵니다. 복음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죠?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믿음은 어디에서 나나요?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듣는 데서 납니다. 그래서 들어야 하고, 전파하는 자가 필요하며, 전파하는 자는 보내심을 받아야 합니다. 이처럼 부르심은 복음을 통해 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절입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저는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이라는 표현이 정말 마음에 듭니다. 이는 하나님의 택하심과 연결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 어떤 것이 창조되기 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정하셨습니다. 우리가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이 된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구원하기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계속 읽습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모든 것이 이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택하셨습니다. 영광을 얻게 하시기 위해 복음을 통해 부르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주권적인 부르심입니다. 유효한 부르심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구원이라고 알고 있는 부르심입니다. “부르신 그들을,” 다시 30절로 돌아갑니다.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이제부터는 이 위대한 실체의 네 번째 항목인 칭의, 의롭다 하심이라는 위대한 진리를 다루겠습니다. 칭의란 무엇입니까? 칭의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선언입니다. 법적인 용어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에 하나님이 만족하신다는 뜻입니다. 죄값이 완전히 다 치러졌다는 의미입니다. 공의,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된 것입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는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어 그의 죽으심으로 완전히 치러졌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칭의는 우리 자신이 의롭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타고난 어떤 의가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 주시고 의를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것이 칭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선언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가 치러야 마땅한 형벌이 다 치러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에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로 우리를 덮으십니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의로 옷입혀 주십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를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의 말씀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미리 아신다는 것은 특정한 사람들과의 친밀하고 영원한 사랑의 관계를 미리 정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우리를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시간이 시작되기도 전에 미리 결정된 것입니다. 시간 안에서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0절입니다.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뭐라구요?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모두 영광에 이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할 것이니라.” 예수님은 모든 고소에 맞서 우리를 중보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면서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우리를 지키십니다.

여기서 뭔가 눈치채신게 있나요? 29절과 30절의 모든 동사가 과거형입니다. 미리 아셨다는 표현에 잘 맞죠. 미리 아셨다는 것은 과거형입니다. 미리 정하셨으니도 마찬가집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르셨다"는 표현은 어떤가요? “부르실 것이다”라고 해야 하지 않나요? "의롭다 하셨다"는 것은요? “의롭다 하실 것이다”라고 해야 하지 않나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영광스럽게 하셨다"는 것은요? 왜 이 모든 것이 과거형일까요? 이것은 헬라어의 또 다른 특징입니다. 이를 '부정과거형(proleptic aorist)'이라고 하는데요, 성경에서 볼 수 있는 멋진 현실입니다. 매우 확실한 것을 표현하기 위해 과거형을 사용하여 이미 일어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광은 미리 정해진 것만큼 확실합니다. 미리 정하심은 과거에 일어났습니다. 미리 아심도 과거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부르심, 의롭다 하심이 궁극적인 영광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에 이미 일어난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자의 안전’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성령님의 사역은 무엇인가요? 성령님의 사역은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시고, 율법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우시며, 의롭게 살게 하고, “아바, 아버지”라고 외치게 하셔서 우리가 자녀됨과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즐기게 하시고, 초자연적으로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위로하심에 대해 생각할 때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성령님은 위로자, 보혜사이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성령님의 위로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삶에서 고난이 있을 때에만 찾으시나요? 물론 그런 상황에서도 성령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지만, 성령님을 통한 위로는 성령님이 여러분의 미래 영광을 확보하시기 위해 여러분의 삶에서 하시고 있는 일을 알 때에 옵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충분한 위로가 되나요? 위로자, 보혜사가 돌보시는 가운데 우리가 영원히 안전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과연 있을까요? 이것이 바로 가장 큰 위안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위로는 없습니다.

다른 모든 위로는 일시적인 위로일 뿐입니다. 저는 성령님이 그런 위로도 주시고 있다고 믿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는 말씀은 믿는 자들이 경험하는 진정한 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위로를 베푸신다고 생각하지만, 그 위로는 그냥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위로하심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겁니다. 성령의 사역이 아들의 사역과 아버지의 뜻과 연결될 때 우리의 위로가 확고해집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위로자, 보혜사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능력이 우리를 영원한 영광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확신으로 위로하십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반응하실지는 모르겠지만, 기쁘게 생각하신다면 31절부터 시작되는 다음 시간을 기다려 주시길 바랍니다.

이제 지난 몇 주간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기도한 후에 잠시 오르간 연주가 흐르는 동안 조용히 묵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 모든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새겨지게 하십시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 오른쪽에 있는 기도실이 열려 있다는 겁니다. 그곳에서 여러분을 섬기고 싶습니다. 방문자실은 저쪽 밖에 있습니다. 세례나 새가족 등록에 관심이 있으시거나, 영적 필요가 있으시거나,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으시거나, 기도해 줄 사람이 필요한 분이나, 상담이나 도움이 필요하신 분이 있다면 언제든지 새가족실로 오시길 바랍니다. 특히 성령님이 함께하고 계신지, 천국으로 가고 있는지 확신이 없으신 분들에게는 구원에 대해 알려드릴 겁니다. 이제 정말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후에 잠시 묵상하시면서 이 모든 것을 여러분의 마음에 새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압도하고 우리 안에 넘쳐 흐르는 놀라운 구속의 목적에 담긴 영광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이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 놀라운 것은 우리의 어떤 선택이나 성취, 공로와는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로 정하시고 영원히 사랑하시며, 친밀하게 주님을 아는 특권, 영원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예수님께 사랑받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를 영원히 안전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 진리를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능력에 감사드리며, 이 위로 속에서 기뻐하고, 이 삶에서 그 기쁨을 나타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행하게 하옵소서. 심지어 베드로의 말처럼 여러 가지 시련이 우리에게 닥칠 때에도 말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더욱 깊이 사랑하여, 아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발견할 수 있는 영원한 영광의 위로를 모르는 이들에게 나눌 수 있게 하옵소서. 이 목적을 위해 우리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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