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그레이스 교회 성도님들은 설교시간에 구약 강해 설교를 기다리고 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가끔 구약 성경으로도 설교를 하기는 했지만, 지난 몇 년간 주로 신약성경으로 성경 강해를 해왔으니 말입니다. 이제 드디어 지난주부터 구약성경 강해를 시작했는데요, 구약 성경 중에서도 특별한 예언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바로 이사야 53장에 있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자, 가지고 오신 성경을 펴 주십시오. 성경을 가져오지 못하셨다면 교회에 비치된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53장입니다. 찾지 못하신 분이 있다면 주변에서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사실 이사야 53장의 예언은 52장 13절부터 시작됩니다.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52장의 마지막 세 절을 53장에 포함시켜서 전체 예언이 한 장에 담기게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예언은 52장 13절부터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나눌 말씀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이사야 52장 13절부터 15절입니다. 제가 읽습니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으로서,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무려 700년 전에 기록되었습니다. 이사야 53장을 포함해서 이사야의 다른 장도 마찬가지로 모두 메시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봅니다. 구약성경이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약속하고, 예언하고, 예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구원자이십니다. 유일한 구원자요, 천국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며, 유일한 구속자이십니다.
제가 알기로 이 세상에는 약 20개의 주요 종교가 있고, 또 그 20개 종교에는 300여 개의 분파가 있습니다. 민족 종교와 전통 종교, 이교 종교까지 합하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겁니다. 저마다의 신념체계까지 고려하면 수백만 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상상의 신들까지 포함시키면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을 겁니다. 하지만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거짓 종교입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기만적이고 현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구원자도 오직 한 분이십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이 창조주이자 구원자이십니다. 성경이 바로 이 하나님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일한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소개합니다. 모든 종교 중에서 자신의 백성을 용서하고 구원하기 위해 죽었다가 부활하신 신은 참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만이, 오직 기독교만이 구원자가 있다고 말합니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진리가 있는데, 바로 기독교 진리입니다. 세상에는 오직 한 구원자가 있는데,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기독교만이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그 누구도 스스로의 노력으로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이라도, 아무리 종교 활동과 의식, 예식을 열심히 행하는 사람일지라도 스스로의 노력으로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성경은 구원이 선물이라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눈물로 자비를 구하며,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다고 신뢰하는 이들이 받는 선물입니다. 우리 죄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 죽으시고,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이들이 받는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모두 받으셨기에 구원받을 수 있다고 신뢰하는 이들이 받는 선물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지금까지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그 누구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모두에게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구원자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해서 천국에 데려가기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의 메시지이고 이 메시지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겁니다.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어땠을까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시기 700년 전인 이사야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때로 돌아가서 유대인의 눈에는 예수님이 어떻게 보였을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항상 기다렸습니다. 메시아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인데, 왕이 될 사람에게 기름을 부었기 때문에 왕을 뜻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위대하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유대인의 시조인 아브라함 때부터 나라가 번영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죠. 그 언약을 아브라함의 자손과 족장들과 반복해서 맺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반복해서 언약을 맺으며 이스라엘을 세상적으로도, 영적으로도 구원하실 때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영광을 주실 것이라고, 또 이스라엘을 통해 이 세상에 영광을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작은 민족 이스라엘을 축복하시고 복의 근원으로 만드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약속이 성취되기를 고대했습니다.
그 약속이 다윗에게 이어졌죠. 이 약속을 성취할 사람이 다윗의 혈통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다윗의 혈통에서 나온 고귀한 자손이 약속된 왕, 기름부음 받은 자, 메시아가 되어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이스라엘을 통해 영광과 축복의 모든 약속들을 이룰 것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왕을 기다렸습니다. 이스라엘을 대적에게서, 나쁜 상황에서, 모든 고통에서 건져낼 그 왕을 기다렸습니다. 복과 번영과 민족과 영향력에 관한 구약성경의 모든 언약을 이루실 그 왕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에 평화와 의를 줄 그 왕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왕이 곧 오시기를 고대했습니다. 모든 세대가 그랬습니다. 심지어 모든 유대인 가정이 그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찍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이 주어졌고, 그 약속을 대대로 선지자들이 반복해서 선포하면서, 모두가 그 왕이 오기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왕을 기다렸습니다. 자신들이 처음에 선택한 사울처럼 훌륭하고 능력있는 왕을 기다렸습니다. 군사 지도자요, 지배자요, 정복자를 기다렸습니다. 자신들이 혐오했던 모든 것과 견디며 참았던 모든 것, 분노했던 모든 것에서 구해내 영광의 자리로 데려다 주기를 바랐습니다. 또 자신들을 통해서 세상에 평화와 의가 전해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메시아를 기다려야 할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이 메시아는 사람이며 여자의 후손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죠.
반면에, 다윗은 시편에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이라고 했습니다. 메시아를 주라고 불렀습니다. 다시 말해서 메시아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이사야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렇습니다. 메시아는 하나님이자 사람이면서 처녀가 잉태한 자입니다. 또 메시아는 아브라함의 후손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족보가 기록된 겁니다. 메시아는 다윗의 고귀한 자손일 것입니다. 유다 지파의 자손일 것이며,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아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단서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수 세기 동안 그 왕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처녀의 몸에서 잉태되었습니다. 유다 지파에서 태어났고, 다윗의 자손이었으며,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은 신성을 증거했습니다. 세상이 이전에 보지 못했고 이후에도 결코 볼 수 없을 것이며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이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바로 메시아로 인정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메시아가 맞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메시아의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보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팡파레가 울려퍼지고 열병식이 열리는 화려한 대관식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을 구유, 다시 말해서 짐승의 여물통에 눕혔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임하신 겁니다. 또 예수님의 탄생을 제일 먼저 축하한 사람들은 가장 낮은 사회계층에 속한 목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멸시받던 조그만 시골 동네 나사렛의 평범한 가정, 아니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정에서 자라셨습니다. 초라하고 보잘것 없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직위나 권력에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사회 지도자들의 인정과 존경을 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군사를 모으거나 통치 기반을 닦지도 않으셨습니다. 반면 예수님께 능력이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질병을 떠나가게 하셨던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질병과 악한 영, 죽음, 자연을 다스리시는 능력을 분명히 갖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지 않으신 일에 실망하긴 했지만, 이 놀라운 신적 능력이 예수님께 있다는 건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님이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불타올랐습니다. 그 날이 바로 예수님이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날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발 밑에 자신들의 겉옷을 깔았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도 깔았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며 외쳤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며 찬송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왕이자 메시아로 맞이했던 겁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죠.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이 때가 적기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유월절 무렵이었기에 예루살렘에는 수십만 명이 있었을 겁니다. 모두 예루살렘에 모여 있으니 예수님이 즉각적으로 군대를 일으켜서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칭송했던 겁니다. 아마 엠마오로 가던 길에 예수님을 만났던 두 제자들과 같은 소망을 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유대인들 모두가 이런 소망을 품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예수님은 저녁에 베다니로 가셨다가 다음날 이른 아침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대상을 공격하셨는데, 그 대상이 로마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대적하던 로마를 공격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유대인들을 공격하셨습니다. 채찍을 만들어서 성전에서 사람들을 내쫓기 시작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에도 성전에서 사람들을 내쫒으셨고 마지막 주간에도 내쫒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을 공격하셨습니다. 유대교의 심장과도 같은 성전에서 공격하셨습니다. 로마가 아니라 성전을, 유대교의 잘못된 가르침을 꾸짖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왕처럼 행동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미 예수님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할 때마다 사라지셔서 실망할 대로 실망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돌아섰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그 주, 다시말해서 고난 주간 전반에 걸쳐 예수님이 성전에서 유대교의 잘못된 가르침을 꾸짖으셨습니다. 진리를 공개적으로 선포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께 등을 돌렸고, 결국 금요일이 되자 예수님을 죽이라고 외쳤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라! 못 박아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로마인에게 넘겨주었고, 로마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것을 바랐지만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원하던 왕이 아니었던 겁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렸듯이, 문제는 당시의 유대교가 거짓 종교가 되어 버렸다는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거짓 종교와 같이, 거짓과 기만으로 가득한 종교가 되었다는 겁니다. 1세기 유대교는 사람의 공로를 주창했습니다. 공로 체계란 하나님께로 가는 길, 천국으로 가는 길을 자신 안에서 찾는 체계입니다. 선한 사람이나 도덕적인 사람, 종교적인 사람이 됨으로써 그 길을 얻는다는 체계입니다. 유대인들은 종교를 공로 체계로 생각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구원자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을 때 유대인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천년 동안 행했던 희생제사와 그 제사를 위해 죽인 수백만 마리의 짐승은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최후 희생제사에 드려질 ‘양’이 될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만족시키고 사람들의 죄의 댓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렸듯이, 유대인들은 죄에서 구원받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의롭다고 여겼기 때문에 구원자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왕이 필요할 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저 힘든 상황과 고난에서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해 줄 구원자가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심각한 죄 때문에 그 심판이 임박했는데도 말이죠.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유대인들은 약속의 후손이자 언약의 후손으로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자녀로 받아들여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등을 돌렸습니다.
자, 진실이요 진리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것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약속이 성취된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려면 먼저 백성들을 구원하셔야 했습니다. 주의 나라는 구원의 나라이기 때문이죠. 예수님의 나라에 속하는 백성은 죄로부터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죄의 삯이 지불되기 전에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다른 그 누구에게도 이 나라가 허락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전까지는 주의 나라를 임하게 하실 수 없었습니다. 주의 나라가 임하기 전까지는 이스라엘은 대적에게서, 힘든 상황에서 구원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고난에서 구원받으려면 먼저 죄에서 구원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셔야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바로 이 복음이 예수님이 선포하신 것이고, 예수님의 부활 이후 사도들이 선포한 것이며, 신약성경 저자들이 전한 것이고, 진정한 교회가 처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이 복음을 믿어야 했습니다. 죄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믿어야 했습니다.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것과,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도래할 왕국에서 통치하실 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셔서 자녀들을 영적으로 구원하신 후에 약속된 나라로 데려가실 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왜 이것을 믿어야만 했나요?”라고 물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생제사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믿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매일 아침 제사와 저녁 제사에서, 모든 대속죄일에, 또 다른 수없이 많은 제사에서 수많은 짐승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었나요? 모두 무엇을 바라보게 했습니까? 유대인들은 알았어야만 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을 때, 유대인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지키며 살아왔던 제도와 연관지어 생각해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몸으로 최후의 참된 희생을 드리러 오셨다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연관지어 생각할 수 없었다 하더라도 이사야 52장과 53장이 말하는 바를 알았어야 했습니다. 다시 이사야 52장에서 53장을 보십시오. 왜냐구요? 내 종,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 장은 메시아를 여호와의 종이라고 네 번째로 묘사한 장입니다. 이사야는 앞서 42장과 49장, 그리고 50장에서 곧 오실 메시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특징을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53장은 네 번째 묘사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정확히 말하자면 이사야 52장 13절부터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여호와의 종 메시아가 이 곳에 실제로 등장해서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름 없는 작가가 표현한 것처럼 계속 메시아가 떠오릅니다. 이 53장은 메시아에 관한 내용입니다. 메시아가 직접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메시아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사야 53장은 시처럼 쓰였는데, 메시아에 관한 이 예언은 다섯 연으로 나뉩니다. 지금부터 이 다섯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3개의 절로 이뤄진 각 연은 그 내용이 점점 심오해지고 무거워지며 길어집니다. 곧 오실 메시아에 관한 강력한 묘사가 점층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말씀드릴 것은 이 이사야 53장이 슬프고 애통하게 느껴진다는 겁니다. 상처로 인해 흐느끼는 그런 어조입니다. 어둡습니다. 이 어두움과 눈물과 흐느낌이 어두운 배경을 만들어 전에 없이 찬란히 빛나는 빛과 대조를 이루게 합니다.
52장 13절에서 15절은 메시아이자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예언입니다. 더 말씀드리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사야 53장은 52장 13절에서 15절에 요약된 내용을 확장한 것이라는 겁니다. 메시아가 고난받으신 후에야 높임을 받으실 것이고, 고난을 받으신 후에야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이사야 52장 마지막 세 절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영광에 앞서 고난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53장에는 이 고난과 영광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53장을 살짝 말씀드리자면, 여호와의 종의 죽음, 즉 메시아의 죽음에 관한 내용입니다.
53장 3절에서 메시아에 관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메시아는 슬픔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메시아는 비통이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입니다. 상처받고, 고통받고, 찔리고, 상합니다. 그 마지막은 문자 그대로 죽음입니다. 7절의 메시아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습니다. 8절을 보면 메시아는 사람들이 사는 땅에서 끊어집니다. 끊어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히브리적 표현입니다. 9절의 메시아는 무덤에 있습니다. 10절에는 속건제물로서의 메시아가, 12절에는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는 메시아가 나옵니다. 이 메시아가 바로 여호와의 종 입니다. 역사 속 모든 유대인들, 그리스도 시대까지의 모든 유대인들은 이사야의 이 부분을 메시아로 해석했습니다. 53장의 그는 바로 메시아입니다.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는 메시아입니다. 으스러지고, 멍들고, 채찍질 당하고, 도살당해 죽음을 맞이하는 메시아입니다.
하지만 이사야 53장에는 부활도 나옵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11절입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 메시아는 결국 승리합니다. 유대인들은 이사야에서 묘사하는 메시아가 죽고, 부활하고, 높임 받으리라는 것을 알아야만 했습니다. 고통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높임을 받습니다. 여기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뒤 모든 구절이 메시아에 관해 말하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높임을 받는 자 역시 메시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 그래서 오늘은 53장을 소개하는 52장의 세 구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놀라게 하는 종’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메시아에 관한 모든 것이 놀랍다고 강조합니다. 13절은 “보라” 이렇게 시작하고, 14절에는 “놀랐거니와”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15절에는 ‘놀라게 할 것’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어떤 번역본에는 ‘흩뿌릴 것’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원래 히브리어로 ‘솟구치다, 내뿜다’라는 뜻이지만 ‘뛰게 하다, 놀라게 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놀라게 할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차후에 더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이제 그 다음에 놀라서 입을 다문 왕들과 나라들이 나옵니다. “보라, 놀랐거니와, 놀라게 할 것이며, 입을 봉하리니”라는 표현은 모두 왕으로서의 메시아의 생애가 놀랍고 충격적이며 탁월할 것이라는 묘사입니다.
이 구절들을 하나씩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3절에 놀라운 계시가 있습니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여기서 ‘보라’는 히브리어로 ‘힌네’(hinneh)입니다.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에 집중해 달라는 말입니다. 관심을 집중시킨 후에 이사야는 네 번째로 메시아를 여호와의 종, 나의 종, 나의 ‘에베드’(ebed)로 소개합니다. 이 에베드는 노예를 의미하는 단어로, 주인에게 복종하며 고된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노예에게는 자기 의지가 없습니다. 주인의 의지만이 있습니다. 노예는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메시아를 자신의 노예로, 순종과 복종의 노예로 규정하십니다. 메시아는 여호와의 뜻을 행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시기에 여호와의 종, 여호와의 노예는 메시아적 호칭입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 백성 중 한 사람으로서,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될 정도로 그 행하는 일이 형통할 것입니다. 결국에는 온 세상으로 놀라서 입을 다물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실망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여호와의 참된 종, 참 이스라엘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가 자기 백성들을 그들의 죄와 고통과 대적으로부터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제 “내 종”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예언서에는 “보라 나의” 또는 “보라”라는 말과 연결되어서 네 번 나옵니다. 먼저 스가랴 3장 8절에 “보라 내 종 싹”이라고 나옵니다. 이 때 내 종은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스가랴 6장 12절에는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라고 나옵니다. 여기서는 메시아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종이 된다고 말합니다. 참 사람이신 예수님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스가랴 9장 9절에는 “보라 네 왕이”라고 나옵니다. 메시아는 사람인 왕인데 여호와의 종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40장 9절도 메시아에 관해 말합니다.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메시아가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된 하나님, 종이 된 왕. 이렇게 나란히 제시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메시아는 사람이면서 하나님이시고, 종이면서 왕이십니다. 메시아는 사람, 하나님, 종, 왕 모두 됩니다.
“보라.” 메시아에 주목하십시오. 메시아에게는 네 가지 강력한 호칭이 있습니다. 사람, 하나님, 종, 왕. 이 네 개의 칭호는 네 복음서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마태복음은 왕으로, 마가복음은 종으로, 누가복음은 사람으로, 요한복음은 하나님으로 묘사합니다. 메시아에 주목하십시오. “나의 종”에 주목하십시오. 메시아의 먹을 양식은 자기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이루는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항상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한다.” 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종이 형통하리니.” 형통이라고 말합니다. “내 종이 형통하리니.” 예수님은 실패한 계획의 희생자가 아닙니다. 숭고한 대의를 위해 순교하셨지만 실패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 종이 형통하리니.” 형통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형통’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지혜롭게, 현명하게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어에서 지혜롭고 현명한 행동은 성공으로 연결됩니다. 여러 인상을 주는 헬라어와 달리 히브리어에서 현명하게 행동한다는 말은 어떤 사람의 행동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형통하리니”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가 여호수아 1장 8절에서는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로 번역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평탄하게 된다는 말은 곧 성공한다는 말이죠. 성공은 현명한 전략에 따라 열심히 일한 결과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 종이 형통하리니’는 ‘메시아가 지혜롭게 행동할 것이다. 현명하게 행동할 것이다. 그리고 성공할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메시아는 하나님의 사역을 성취할 것이고 형통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형통하다”라는 히브리어 단어에는 점진적으로 그렇게 되리라는 개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냥 어쩌다 우연히 주어지는 성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노력 없는 성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현명하고 주의깊은 행동으로 얻는 성공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데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며 행하라고 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다!” 같은 절에서 메시아의 성공이 이렇게 선포됩니다.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불필요한 미사여구들을 모아 놓은 게 아닙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어떤 이들은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이런 표현이 중복되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의미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의미의 고조입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높이 들어올리실 것이고, 그 이후에 더 높이 들어올리실 것이며, 나중에는 가장 높이 들어올리실 것입니다’ 라는 말입니다. ‘높이’는 부활을 의미하고, ‘더 높이’는 승천을 의미하며, ‘가장 높이’는 대관식을 의미합니다. 메시아가 매우 성공적인 삶을 살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부활시키시고, 영광으로 데려가실 것이며, 자기 우편에 앉히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2장 9-11절에서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고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에게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 곧 주(Lord)라는 이름을 주실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모든 사람이 주님께 절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분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메시아가 우주의 왕이 될 것이고, 교회의 머리가 되실 겁니다. 여호와의 종에 관한 놀라운 계시는 메시아가 오실 것이고, 성공할 것이며, 큰 수고를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실 것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계시를 증명하시는 방법은 메시아를 죽음에서 건져 영광으로 데려가시고 하늘 보좌에 앉게 하시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놀라운 모습입니다.
그리고는 놀라운 낮아짐이 이어집니다. 13절의 놀라운 묘사들이 14절로 인해 곧바로 사라집니다.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이 구절이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까? 왜냐구요? 바로 그 다음절에서 나라들과 왕들이 메시아의 영광으로 인해서 입을 다물게 된다고 합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것일까요? 메시아의 생애는 성공적일 겁니다. 메시아는 부활하실 것이고, 영광 중에 하늘에 올라 면류관을 쓸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종이 자신의 백성을 구원으로 이끄는 이 약속된 성공에는 놀라운 낮아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의 처지에 놀랐다고 합니다. 메시아가 높임을 받아서가 아니라 낮아졌기 때문에 놀랐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요? 예, 그렇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말하는데요, 메시아의 낮아짐을 직접 볼 유일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뿐이기 때문입니다.
“놀랐거니와”라는 단어를 잠시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로 ‘적막한’, 또는 ‘황폐한’으로 번역되지만, ‘이성을 잃은’, ‘얼어붙은’, ‘감각이 마비된’ 등으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이성을 상실한 상태를 묘사합니다. 메시아에게 일어나는 일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우리를 얼어붙게 만들 정도라는 겁니다. 무엇이 충격적인가요?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그의 모양은 얼굴과 관련이 있고, 그의 모습은 몸과 관련이 있습니다. 메시아,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얼굴과 몸이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상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메시아의 얼굴과 몸이 완전히 흉측하게 상한다는 겁니다. 히브리어 원문의 문자적 의미대로 본다면, 메시아가 사람의 범주에서 벗어난다는 말입니다. 너무 심하게 일그러져서 사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하게 상한다는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어떤 사람은 메시아의 외모가 너무 볼품없어서 이 땅에 계실 때에 보기 흉했을 것이고, 어쩌면 불구였을지도 모른다고 이해합니다만 그런 말이 아닙니다. 사실 메시아는 사람의 몸,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십니다. 메시아는 죄가 전혀 없는 이상적인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는 모든 면에서 아름다우셨을 것입니다. 메시아는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셨을 겁니다. 그 어떤 사람보다도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셨을 것입니다. 이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런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메시아는 십자가 위에서 사람의 얼굴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손상되고 훼손되고 일그러졌습니다. 시편 22편은 메시아가 십자가 위에서 겪으신 고난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이사야도 앞선 구절인 50장 5-6절에서 메시아의 수염이 뽑히고 침 뱉음을 당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핍박을 당하셨고, 거의 죽을 정도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몸은 피가 쏟아지는 커다란 상처로 가득했습니다. 5cm가 넘는 가시가 가득한 면류관이 예수님의 머리를 찔렀고, 피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형벌을 앞두고 잠을 이루지 못해 고단해 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뺨을 맞으셨습니다. 마치 샌드백이 된 것처럼 여러 차례 주먹으로 맞으셨습니다. 침 뱉음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상한 얼굴을 묘사하고 있는 이 표현들을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고문으로 망가져 고통받는 거룩한 자의 얼굴이 어땠을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 피와 상처로 뒤덮인 모습은 아마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겁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바로 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놀랐다고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놀람은 경멸의 놀람입니다. 그들을 구원할 메시아가 그럴 리가 없다고 놀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낮아짐을 목격한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그들이 원했던 메시아요 왕의 모습과는 너무나 괴리가 있었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가장 참혹하게, 가장 심하게, 가장 낮은 밑바닥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예수님의 높아짐은 놀랍고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예수님의 낮아짐을 목격한 사람들은 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의 높아짐은 모두가 보게 될 것입니다. 놀라운 계시에서 놀라운 낮아짐으로, 마침내는 놀라운 높아짐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이 구절은 메시아의 높아짐을 말하고 있습니다. 장면이 또 한 번 충격적으로 바뀝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라들과 왕들까지도 놀라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나라들과 왕들이 예수님을 보자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된다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어떤 성경 번역본 중에서는 이 ‘놀라게 하다’라는 표현이 “흩뿌리다”(sprinkle)로 번역되어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번역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우리가 히브리어 원문을 번역할 때,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의 경우 어떤 의미를 취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문자적 의미를 취할 수도 있고, 은유적인 의미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 “흩뿌리다”가 적절한 번역이기는 합니다. 히브리어 원어의 문자적 의미가 ‘솟구치다, 내뿜다’라는 뜻이니까요. 그래서 일부 번역자들은 “흩뿌리다”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죽으심과 낮아지심을 통해 나라들을 깨끗케 하실 것이다. 예수님이 많은 나라들을 깨끗케 함으로써, 한순간에 희생제물에서 제사장으로 바뀌신다.”
제가 <맥아더 성경주석>을 쓸 때만 하더라도 이 “흩뿌리다”라는 번역을 수용했습니다. 하지만 좀더 연구를 하면서 “놀라게 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냐고요? 이 “놀라게 하다”가 병행구조에 더 잘 맞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메시아의 상한 모습에 놀랐고, 마찬가지로 메시아의 높아짐에 놀랄 것입니다. 병행 구조에 따라서, 메시아의 높아짐이 만들어내는 결과가 메시아의 낮아짐이 만들어내는 결과와 병행될 필요가 있습니다. 메시아가 낮아진 결과가 놀라움이니까, 마찬가지로 메시아가 높아진 결과도 놀라움이어야 맞겠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반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문맥상으로는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단어로만 보자면 아예 다른 단어가 아닌가요? ‘흩뿌리다’와 ‘놀라게 하다’는 서로 다른 단어처럼 보이는데요.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 ‘나자’(nazah)는 원래 ‘솟구치다’라는 뜻이지만, 은유적으로는 ‘뛰게 하다, 놀라게 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감정이 격해져서 가슴이 뛰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는 증거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은유적으로 ‘놀라게 하다’라는 뜻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흩뿌리다’에 번역을 적용한다면 사람들은 깨끗하게 될 수 있지만, 나라들이 깨끗하게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세상 모든 나라가 ‘놀라게 될 것’이라는 말은 가능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이 세상의 모든 나라가 그리스도의 오심을 보며 두려움에 떨게 될 것입니다. 마치 감전된 것처럼 떨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29-30절을 보면, 인자의 징조가 큰 영광 가운데 나타납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으며, 별들이 떨어지고, 하늘의 권능들이 떨 것입니다. 24장 27절에서는 번개가 번쩍이는 것 같이 오신다고 합니다. 다니엘도 같은 말을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날이 오면 사람들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려달라고 애원할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입니다.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나라들과 왕들이라고 콕 짚으셨을까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말 그대로 온 세상을 취하여 그의 왕국을 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왕들을 대신해 다스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라들은 왜 분노하게 될까요? 시편 2편을 보겠습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우실 때, 그 왕의 영광스러운 높아짐을 모든 나라가 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는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만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는 세상 전체가 깜짝 놀랄 것입니다. 마치 영화같이 하늘이 어둡게 되고 그리스도가 영광 중에 나타나시는 광경을 모두가 볼 것입니다. 이 땅의 왕들이 예수님을 보고 말문이 막힐 것입니다. 언제나 입을 열 권리가 있다고 믿었던 자들이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충격과 경악, 극도의 놀라움, 격한 감정으로 그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 세상은 침묵할 것입니다. 왜 침묵할까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다시 오심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에는 온 세상이 볼 것입니다. 온 세상이 이해할 것이고, 놀라움에 입을 다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한 순간에 재림에 관한 신학 공부를 마치게 되는 것이죠. 주님께서 사람보다 못한 모습이 되셨을 때에 1세기의 유대인들은 크게 놀랐습니다. 주님께서 높아지실 때에는 전세계 사람들이 놀랄 것입니다. 온 세상이 주님을 볼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죽으심을 포함하는 낮아짐과 높아짐 사이에 어떤 일이 있어야만 합니까? 무슨 일이죠? 부활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이 있어야죠. 이사야 52장 13절을 보면, 부활이 암시되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명시되어 있습니다. ‘받들어’, 부활을 뜻합니다. ‘높이 들려서’, 승천을 뜻합니다.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주님의 대관식을 뜻합니다.
시편 16편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메시아의 영혼은 시들지 않을 것입니다. 메시아의 육체가 무덤에 머물며 쇠하지 않을 것입니다. 메시아가 생명의 길을 볼 것입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이 시편 16편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했습니다. 시편 16편에 부활이라는 단어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죽으셨다가 높아지시기 위해서는 먼저 부활하셔야 하다는 것이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시편 16편은 메시아 부활의 약속입니다. ‘높이 들리기’ 전에 ‘부활’하셔야 하기에 이사야 52장 13절의 ‘받들어’는 부활이 명확합니다.
한편, 사도 바울은 이사야 52장 15절 뒷부분을 인용하면서 중요한 원리를 설명했습니다.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높아짐과 통치뿐만 아니라 복음 전파가 그 일들을 이루게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깜짝 놀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듣지 못했고, 깨닫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도 재림의 메시지가 계속해서 선포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계속해서 깨닫고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는 궁극적인 성취의 때를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과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메시아의 생애가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메시아가 하나님의 사역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메시아는 살아나실 것이고, 하늘에 오르실 것이며, 면류관을 쓰실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사야 선지자가 53장에 기록한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놀라운 나타남, 놀라운 낮아짐, 놀라운 높아짐이 나온 후에, 첫 구절에서 놀랍게도 사람들의 배척이 나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슬픈 기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사야 53장 1절입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미래를 내다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이미 이 구절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에도 유대인들은 이미 이 구절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것을 믿었나요? 소수의 남겨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의 내용을 성경을 통해 들어 알고 있습니다. 누가 그것을 믿었나요? 사람들은 거절했습니다. 슬픈 현실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오늘날 우리가 물어야 하는, 또 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죄 때문에 죽으셨고, 여러분을 의롭다 하기 위해 부활하셨으며, 높이 들린 왕으로서 언젠가 다시 오셔서 자기 백성을 약속된 왕국으로 데려가실 것이라고 믿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곧바로 세상을 심판하고 다스리실 수도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전에 먼저 여러분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을 여러분 믿으십니까? 곧바로 영광받으실 수도 있었지만 먼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믿을 때 여러분에게 구원이 임합니다. 아직도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분이 있다면, 저와 함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순간이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날이 될 것입니다.
아버지, 성경이 가진 일관성과 그 능력에 감사드립니다. 성경 말씀이 살아 있고 활력이 있음에 감사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 영혼 안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심을 믿습니다. 우리를 일깨우시고 진리를 부어주십니다. 그 진리를 모르던 자들이 깨닫고, 이미 그 진리를 알고 있는 자들은 말씀을 더 사랑하며 더 신실하게 선포하는 자가 됩니다. 우리 구세주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하신 생명을 선물로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놀라우신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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