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로 구원과 거룩과 영광의 소망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를 이해함으로써, 우리가 순종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복에 이르는 길이자 영생을 받는 길입니다. 따라서 다른 어떤 것보다 진리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롬 3:4).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이십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또한 성경도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 17절에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진리 가운데 예배하고, 진리를 믿고, 진리를 말합니다. 진리를 묵상하고, 진리를 이해하며, 진리를 따라 걷습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 가운데 거하는 것을 기뻐하며, 진리에 순종합니다. 이 모두가 진리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 교회 이름을 ‘진리공동체교회’라고 했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진리가 우리 교회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죠. 진리는 우주의 근원적 원리입니다. 참된 이치입니다. 진리는 사실이고, 하나님은 진리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진리를 정하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참된 것을 계시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성경도 진리입니다. 성경에는 참 하나님과 참 그리스도, 참 성령에 대한 진리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진리의 무한한 원천입니다.
저는 43년에 걸쳐 신약성경을 한 절 한 절 살펴보았고, 마가복음을 맨 마지막에 봤습니다. 마가복음만 2년이 걸렸죠. 누가복음을 10년, 마태복음을 8년 동안 살펴봤으며, 요한복음도 수년간 살펴봤습니다. 신약 나머지 부분도 모두 살펴봤습니다. 후회되는 게 하나 있다면 너무 빨리 살펴봤다는 겁니다. 너무 많은 것을 놓쳤습니다. 성경에는 제가 살펴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있습니다. 하고자 한다면 계속해서 다시 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살펴보고, 또 다시 살펴봐도 성경에 있는 진리는 결코 고갈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4일 밖에 없습니다. 오늘이 목요일이니까 주일까지 며칠 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리의 일부만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몇 년 전에 <예수님이 전해주신 복음>이라는 책을 썼는데, 집필하는 동안 정말 하나님께서 많은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찾아서 읽어보실 수 있을 테니까 그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할 때,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다룰 수 있도록 많은 훈련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헬라어, 히브리어, 신학, 교회사 등을 열심히 배웠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룰 줄 안다고 생각했고, 쟁점들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진리를 옹호하기 위해 변증하거나, 그 당시 진행되는 논쟁에서 변증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혀 몰랐던 것이 있었다면, 복음을 교회에 분명하게 전하는 것에 제 사역의 대부분을 할애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이 아니라, 혼란에 빠진 교회에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이 전해주신 복음>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에는 <사도들이 전해준 복음>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는 <예수님이 전해주신 복음>과 관련하여 제기된 수많은 질문들에 답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책도 몇 권 더 썼습니다. 그 중에 <진리 전쟁>에서 복음의 진리로 돌아가자는 내용을 다뤘습니다. 그렇게 복음과 관련된 쟁점들을 다룬 책들을 몇 권 더 썼죠. 그런데 제가 아직 다 쓰지 못한 책이 하나 있습니다. 곧 마무리하려고 하는데요, 복음과 관련된 삼부작의 일환으로, 제목은 <바울이 전해준 복음>입니다. 주보를 보시면 이번 주제와 같다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 주제는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과제이기도 합니다. 이 주제가 가치있는 이유는, 바울이 전한 복음이 공격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바울이 신약성경에 기록한 것을 거부하면서, 바울의 기록에 대해 교회가 이해하고 있었던 바를 거부하는 겁니다. 즉 종교개혁 당시에 분명하게 회복된 복음을 거부하는 겁니다.
바울이 전해준 복음은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어떤 오류를 다루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류는 여러분 스스로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살펴볼 것이기에 오류 보다는 바울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바울에 대한 자료는 참 많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에 대한 많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고, 바울이 저술한 13권의 서신서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 살펴보지 못할 정도로 많이 있죠.
바울은 복음을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언급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복되신 하나님의 복음이자,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복음, 그리스도의 복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은혜의 복음, 평화의 복음, 우리 구원의 복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표현은 “내 복음”이라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복음을 확장시켜 “우리의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의 복음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의 복음은 또 무슨 뜻일까요? 은혜의 복음, 평화의 복음, 구원의 복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복되신 하나님의 복음이란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이 복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바로 이 복음을 선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 15절에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도 친숙한 표현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죠.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시간 순서대로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전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그토록 전하기 원했던 것은 또 무엇입니까? 바울은 왜 전해야 할 의무를 감당했던 걸까요? 이 복음은 무엇일까요?
복음을 왜곡하는 것을 경고하는 말씀으로는 갈라디아서 1장이 있습니다. 오늘은 간단히 소개만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6절은 복음을 왜곡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합니다. 1장 6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바울은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라고 말했습니다. 헬라어 동사인 ‘다우마조’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복음서에서 매우 자주 사용되는데, 설명할 수 없는 예수님의 기적에 놀라는 사람들을 기록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문자 그대로 보자면 바울은 사람들이 복음을 저버리거나 다른 복음에 이끌리는 것에 놀란 겁니다. 바울은 이 ‘다우마조’라는 단어를 두 가지 현상에 사용합니다. 그 중 하나가 아까 말씀드린 갈라디아서 1장 6절이고, 다른 하나는 데살로니가후서 1장 7절부터 10절에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묘사하며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일어날 놀랍고 경이로운 일을 설명합니다. 즉 예수님이 불꽃 가운데 나타나실 것이고,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며, 성도들에게는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신다’라는 표현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바로 ‘다우마조’입니다.
그렇게 바울은 이 단어를 특정한 상황에서만 두 번 사용했습니다. ‘너희들을 부르신 분으로부터 그렇게 속히 떠나 변절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다’라는 의미로 사용한 겁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 즉 유효한 부르심, 내적인 부르심, 실제적인 부르심, 구원을 얻게 하는 부르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 즉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효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은 회심한 사람들을 의미하는데, 다른 복음에 이끌리고 유혹을 받았다고 합니다. 마음을 빼앗기고 정신이 혼미해진 겁니다. 이제 바울은 7절에서 “다른 복음은 없나니”라고 말합니다. 다른 복음은 정말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계속해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여기 에서 바울이 “우리”라고 하는 복수 대명사를 사용하지만, 이것은 바울이 자신을 낮춰 부를 때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저주를 받고 파멸에 이를 것이라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도 동일한 표현이 나옵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모든 진리가 다 중요하지만, 그 모든 진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진리는 복음입니다. 복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살펴볼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자 복되신 하나님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복음이자, 은혜의 복음이고, 구원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밤에는 복음의 영광, 영광스러운 복음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눌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는 ‘만족시키는 복음’이라는 주제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텐데요, 1부에서는 복음이 어떻게 죄인을 만족시키는지, 2부에서는 복음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족시키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내일 저녁에는 화목하게 하는 복음을, 그리고 토요일 아침에는 주권적인 복음을 1, 2부로 나누어 살펴보고, 주일 아침에는 겸손하게 하는 복음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 저녁에는 질의응답 시간을 통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정말 아주 유익한 시간이 될 겁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복음의 영광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여러분이 한 가지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는데, 복음을 시간 순서대로 살펴보려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복음을 생각할 때 제 마음에 떠오르는 한 장이 있습니다. 주제가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그 장으로 설교할 겁니다. 아시죠? 저는 어떻게든 그렇게 할 겁니다. 모든 길은 고린도후서 4장으로 이어집니다. 고린도후서 4장을 보겠습니다.
성경 교사 사역 거의 끝 무렵에, 고린도후서 전체를 한 번 다뤘습니다. 정말 기뻤습니다. 제가 목사 초년생 시절 고린도후서를 가르셨다면,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실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기록할 때 겪었던 일을 이해하려면 수십 년 동안 두들겨 맞은 경험이 있지 않고서는 어렵습니다. 또한 이 열정적인 편지에 담긴 바울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오랜 사역 경험이 있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과 영혼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으시다면 고린도후서 주석을 사서 매일 한 장씩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고린도후서 4장이라는 놀라운 편지를 쓸 때 바울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게 되실 겁니다.
복음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갈라디아서나 로마서, 골로새서,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을 떠올리곤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전한 설교를 떠올릴 수도 있겠죠. 복음이 매우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 설교 시리즈에서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볼 겁니다. 복음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데도 간과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은 복음의 영광에 관한 통찰을 줍니다. 사실 고린도후서의 주제는 고난입니다. 그런데 이 장이 좋은 출발점이 되는 이유는 복음의 영광에 대해 상당히 많은 내용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절로 가보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복음 시리즈를 시작하는 오늘 말씀의 주제가 바로 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영광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복음의 영광을 이해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복음의 영광은 모든 것을 압도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자연을 압도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강력한 진리입니다. 이처럼 복음의 영광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합니다. 복음이 가진 영광은 복음이 다른 모든 것을, 다른 모든 진리와 메시지를 초월하도록 만듭니다. 앞서 제가 고린도후서의 주제가 고난이라고 한 것은 바울이 이 편지 전반에 걸쳐서 자신의 고난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바울은 그토록 극심한 고난에 자신을 내어 주었을까요? 고린도후서에 의하면 바로 복음의 영광 때문었습니다. 복음과 같은 것이 없고, 복음에 이를 만한 것이 없으며, 복음에 준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선순위, 탁월성, 중요성에 있어서 복음보다 앞서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가장 영광스러운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오늘날의 복음주의 교회에는 이러한 진리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복음을 끌어내려서 값싸게 취급하고 있죠.
사도 바울의 삶을 바라보면 고난이 보입니다. 오늘날 이와 다른 복음을 생각해 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다른 복음이 아닙니다. 다른 복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의 내용을 조금 수정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만들려면 복음에서 고난을 제거해야 한다면서 말이죠.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마다 사람들은 격노하고 분노하며 적대적인 잔인한 태도를 보였지만, 바울은 결코 함부로 복음을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일종의 유언을 남겼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입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그리고 또 뭐라고 합니까?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시작할 때부터 마지막까지 이어진 싸움이었습니다. 바울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알고 계실 겁니다. 바울의 머리는 차가운 벽돌 위에 놓여 햇살에 반짝이는 도끼날에 잘렸고, 그 즉시 주님과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전에도 바울은 수차례 감옥에 갇혔습니다. 바울은 마을에 들어가면 “이 마을에는 어떤 감옥이 있나요?”라면서 감옥의 위치를 물었습니다. 숙소를 묻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디에 머물게 될지 알았던 것입니다.
바울을 따라다니던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 선생님, 좀 편안하게 사역하시면 안 되나요? 온 동네를 다니면서 감옥에 갇히거나 쫓겨나거나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평생 선생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야만 합니까? 유대인들의 음모, 이방인들의 음모, 군중들의 음모, 권력자들의 음모 속에서 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꼭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됩니다. 좀 융통성 있게 사세요.”
바울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견뎌낸 걸까요? 바로 복음의 영광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고린도후서 4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평소에는 몇 안 되는 구절을 아주 천천히 깊게 다룬다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로마서 강해설교를 시작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성도님들 모두가 한껏 들떠 있었죠. 그런데 설교를 시작하는 제 첫 마디가 바로 “바울”이었고, 그렇게 로마서 첫 설교는 온통 바울에 대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마 모두들 이렇게 생각하셨을 겁니다. “맙소사, 한 번에 한 단어씩 설교하려고 하시나보다. 큰일났다!” 제가 가끔은 너무 깊게 파고든다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좀 더 넓은 범위로 여러 장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 장이 어떻게 묶여 있는지 보겠습니다. 바울은 4장 1절 끝에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16절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16절 끝에서도 바울은 동일하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이 표현이 정말 중요합니다. 안타깝게도 이 구절은 제대로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헬라어 동사 ‘엥카케오’와 ‘카케오’는 ‘악한’이라는 형용사 ‘카코스’를 어근입니다. 악하게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악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내게는 악행을 저지르고 싶은 유혹이 여러 차례 있었다. 복음의 진리를 벗어나 악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악을 행하며 편하게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결코 악한 일을 하지 않았다.”
잠시 고린도후서 1장 3절을 보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고린도후서를 기록하면서 몇 줄 지나지 않아 벌써 자신의 모든 환난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도 환난을 언급합니다. 5절에서는 자신의 고난에 대해 말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친다고 합니다. 6절에서는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한다”고도 합니다. 8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얼마나 심한 환난이었나요?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바울은 죽음 직전까지 끌려갔던 것입니다.
9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다시 말해서 바울이 처한 당시 상황에서는 전부 끝난 줄 알았다는 겁니다. 대적들에게만 모든 힘과 기회가 있고 자기 편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는 겁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다시 이어서 읽겠습니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2장에서 바울은 또 다른 근심이 있다고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 때문이었습니다. 교회가 목회자를 근심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다시 말해서 내가 너희에게 근심이 되고 너희가 나에게 근심이 되니 슬프다는 겁니다. 나는 너희가 나를 대하는 방식이 싫고 너희는 내가 너희를 대하는 방식을 싫어하기에 괴로움이 심하다는 겁니다.
바울은 실제로 고린도 교회에 방문했습니다. 고린도후서에 따르면 회중 가운데 누군가가 바울에 정면으로 맞서서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공격했는데도 아무도 바울을 변호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상심한 채로 고린도를 떠났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렇게 한 겁니다.
다시 4장 8절로 가보겠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다시 말해서 자신이 언제든지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12절입니다.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만, 바울은 실제로 이렇게 살았습니다. 6장 4절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바울의 삶이 이랬습니다. 8절에서는 대조를 이루어 설명합니다.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바울의 삶이 바로 이랬습니다.
10장은 바울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보여줍니다. 10절을 보면 바울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나요? 바울이 못생겼다, 말도 잘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의 외모가 잘생겼거나 예쁘다고 해 봅시다. 말을 얼마나 잘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모는 별로지만 말을 잘한다고 해 봅시다. 그래도 누군가 들어주기는 할 겁니다. 하지만 외모도 별로인데다 말도 잘 못한다고 기회 자체를 주지 않는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니까 한마디로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에게 인신공격을 퍼부었다는 겁니다. 혹평을 날렸습니다. 못생긴 데다가 말도 잘 못한다고 말이죠.
이제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11장 6절입니다.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그리고 정말 유명한 23절로 이어집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거짓 사도들을 가리키는 것이죠.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즉 나 바울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서 얼마나 자격이 있는지를 입증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 때문에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많다거나, 책을 많이 썼다거나, 수많은 장소에서 설교했기 때문에 자격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로마인들이 그렇게 했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여기서 바울이 염려한다는 말은 교회의 운영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설교자가 “바울은 교회 운영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을 제가 들은 게 기억이 납니다. 바울의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29절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바울은 어떤 성도가 약해질 때 그 고통을 함께 느끼는 그런 목회자였던 겁니다. 계속해서 29절을 보겠습니다.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바울은 자기 양떼가 죄를 지으면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이 짊어지기에는 너무 큰 짐이었습니다.
이제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4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바울은 이런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대체 당신은 무슨 짓을 하길래 이런 문제들을 몰고 다니는 겁니까? 당신이 불신자들과 분란을 일으키는 이유도 당신이 하는 말 때문이고, 교회와 분란을 일으키는 이유도 당신이 하는 말 때문이오. 좀 적당히 하시오.”
한 대형 교회의 리더를 제가 한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아시는 분일 겁니다. 그분의 작은 목양실에서, 사실은 아주 큰 목양실에서 저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맥아더 목사님,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물론입니다. 하십시오.” “목사님, 편하게 하세요.” “네? 편하게 하라뇨?” “네, 좀 쉬엄쉬엄 하세요. 좀 적당히 하시라구요.” 이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누군가 제게 사역의 본이 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바울이라고 답을 할 겁니다. 전 사도 바울이라면 어떻게 했을지 항상 생각합니다. 바울에게 이런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보게 바울 선생, 좀 편하게 살아도 되지 않소? 불신자들에게 너무 그러지 마시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오. 좀 느긋하게 하란 말이오.” 바울에게는 이런 말이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의 진리를 모호하게 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줄일 수 있는게 아닙니다. 바꿀 수 있는게 아닙니다.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진리는 수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고난과 괴로움이 가득한 삶을 살다가 결국 순교했던 이유는 복음의 영광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4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무엇부터,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두고 봐야 하겠습니다. 저도 제 스스로 무슨 말을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궁금합니다. 자, 바로 이제부터 말씀드리는 것이 바울이 복음의 영광에 비추어 자신의 삶을 바라본 관점입니다. 이제부터 바울이 이해한 복음의 영광에 대한 몇 가지 요점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네 가지, 아니 한 열 가지 정도를 말씀드릴 텐데, 이해가 되는 만큼만 받아들이시면 되겠습니다.
첫째, 바울은 새 언약이 우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새 언약의 우월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복음이 영광스러운 이유는 이 복음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새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바울이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라고 했는데, 어떤 의미로 그렇게 말한 걸까요? 어떤 직분을 말하는 걸까요? “그러므로”라는 말은 왜 썼을까요? “그러므로”는 전환구입니다. 앞에서 말한 내용의 결과를 말할 때 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어떤 직분입니까? 3장 8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영의 직분이라는 표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반면 9절에서 말하는 정죄의 직분은 율법입니다. 율법에도 영광이 있습니다. 율법에도 영광이 있다는 걸 아십니까? 바울은 3장에서 율법의 영광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모세의 얼굴에 가득했습니다. 율법에도 영광이 있는 이유는 율법이 하나님의 본성을 직접적으로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에도 영광이 있습니다. 9절입니다.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거늘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6절에서 바울은 율법 조문의 직분이 아닌 영의 직분을 말합니다.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고 영은 살리는 것입니다. 영의 직분, 또는 의의 직분은 새 언약이 주는 구원으로, 풍성한 영광을 가지고 있습니다. 3장에서 바울은 대조법을 사용해서 설명합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대조합니다. 6절을 보면 새 언약은 살리는 것, 생명을 줍니다. 7절부터 9절을 보면 새 언약은 의를 줍니다. 7절과 10절, 11절에 따르면 새 언약은 영원합니다. 12절은 새 언약이 소망을 준다고 합니다. 13절부터 14절에 따르면 새 언약은 가려지지 않고 분명합니다. 16절부터 18절에서 새 언약의 핵심은 그리스도입니다. 17절부터 18절에서 새 언약은 주의 영, 즉 성령의 능력을 입었습니다.
우리도 이 직분을 받았습니다. 이 직분은 생명과 의를 줍니다. 이 영원한 직분은 옛 언약처럼 대체되지 않고 영원한 소망을 가져다 줍니다. 이 직분은 분명하고,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성령의 능력을 입은 것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회심하기 이전에 어떻게 살았는지 잘 아실 겁니다. 바울은 무엇에 헌신했던 사람이었습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습니다. 괴팍한 율법주의자였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었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열정으로 율법을 따랐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그렇게 고백하고 있죠.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철저한 율법준수를 자신의 유익으로 여겼고,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새 언약을 발견한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을까요? 바울에게 전환점이 되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소망 없는 율법주의에서 놀라운 방식으로 구원을 받은 겁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인가요? 보기 드문 회심자였습니다. 여러분은 신약의 여러 바리새인 중에서, 유명한 바리새인 중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을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아마 잘 떠오르지 않을 겁니다. 매우 소수만이 회심했죠. 사도 바울에게 회심은 영광스러운 새벽과도 같았습니다. 바울은 탕자 이야기에 나오는 형이긴 하지만 다른 형입니다. 자신의 위선을 회개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형이죠.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자기 종교의 죄를 발견하지는 못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날, 영광스러운 날의 미명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새 연약의 영광이 옛 언약의 바리새인에게 비출 때, 바울은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이 직분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의 메시지를 바꾸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을 주는 복음의 영광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결코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겁니다. 복음의 영광이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답고 충만한지 이해한다면 말이죠. 복음을 이해시키기 위해 지나치게 확대하거나, 지나치게 축소하거나, 일부를 생략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완전한 영광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것을 인내하며 견딜 수 있었습니다. 이는 복음의 영광을 알았기 때문이고, 인격적으로 복음의 영광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장에 따르면 바울은 스스로 의를 세우려고 했던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발견했습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바로 이것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전해야 하는 메시지임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둘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로 이 직분을 맡게 되었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 이 직분을 맡고 있으니”(새번역). 복음을 선포할 자격을 스스로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자격을, 복음을 선포할 자격을 스스로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하기에 합당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이 일이 허락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1장 12절입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제가 왜 이 직분을 맡고 있는지 아십니까? 바로 하나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제게 이 직분을 행할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 스스로 이 직분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은 신학교를 나오셨잖아요.” 신학교 나왔다고 얻은 것이 아닙니다. “말솜씨가 좋으시잖아요.” 말을 잘한다고 이 직분을 얻게 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하나님 말씀을 펼쳐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것은, 아무런 가치 없는 죄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정말이지 놀라운 특권입니다.
좋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제 힘으로 이 자격을 얻은 것이 아닌 것처럼, 제 연약함 때문에 이 자격이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비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이 자격을 주셨습니다. 제 실패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렇게 저는 이 가르치는 직분을 하나님의 자비로 여기기 때문에, 제가 이룰 성취에 대해서는 크게 기대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가끔 사역자들이 번아웃 되었다, 완전히 지쳐버렸다,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완전히 지쳤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무슨 소립니까? 번아웃은 일이 힘든 것과는 사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배관공이 번아웃 되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육체 노동을 하는 사람이 번아웃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얼마나 일이 힘든가에 대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죠. 번아웃은 기대가 충족되지 않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발생합니다. “나는 이런 대우를 받을 사람이 아니야. 내게 이럴 순 없어. 일은 잘 풀리지도 않고 말이야. 나를 이렇게 대하다니 참을 수 없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발생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받아 마땅한 대우를 실제로 받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만 하는 대로 우리를 대우하지 않으십니다. 사역을 하면서 번아웃이 된다는 것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자신들이 자격을 갖췄다고 생각하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또 열심히 사역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할 것에 대해 비현실적인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입니다. 사실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선포할 기회를 주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우리는 그 자비를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제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는 제가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몰랐습니다. 제 아버지도 목회자셨고, 제 할아버지도 목회자셨습니다. 저희 집안에는 목회자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가문에 흐르는 뭔가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제게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운동선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저는 미식축구를 사실 꽤 잘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미식축구를 잘하면 응원도 많이 받고 팬들도 생기지 않습니까? 실제로 저는 꽤 인기가 좋았습니다.
저는 충분히 다른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직분을 저에게 주셨고, 계속해서 저를 인도하셨습니다. 제가 이 직분을 감당하게 된 것은 정말로 하나님의 자비 덕분이었습니다. 저는 매 주일마다 이곳에 섭니다. 여기에서 50년째 주일마다 설교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특권이 있을까요? 이 자격 없는 종에게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있을까요?
바울은 복음의 영광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고린도후서에 잘 나와 있죠. 그러니 이제 제 얘기는 그만하고 말씀을 보겠습니다. 아마 제 이야깃거리가 떨어졌나 봅니다. 그래도 말씀은 계속해서 전할 수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제가 원고 없이 설교를 해서 그렇습니다.
자, 세번째입니다. 셋째는 바울이 새 언약의 우월성을 이해하는 데서 복음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영광은 바울이 자신의 직분을 자비로 여기는 데서 나타났습니다. 복음의 영광은 순전한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데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 이러한 직분을 주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에 대해 여지를 남기지는 않으십니다. 저는 2절 말씀을 참 좋아합니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저에게는 은밀한 사생활이 없습니다. 비밀이 전혀 없습니다. 제게 은밀한 사생활이 있다는 것이 드러나면 여러분이 저를 미워하지 않겠습니까? 목회자가 부끄러운 사생활이나 스캔들로 신문이나 시사 프로그램을 장식하는 것은 정말이지 끔찍한 일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그런 은밀한 사생활은 없다. 한 점 부끄럼이 없다. 오직 주님을 위해서 산다.”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은밀한 사생활이 있다고 비난한다면 어떻게 변론하시겠어요? 바울처럼 하실 수 있겠습니까? 실상은 교린도 교인들이 숨은 부끄러운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도 그렇게 했을 거라고 상상하면서 비난한 것입니다. 실제로 고린도후서의 행간을 읽어 내려가보면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사역하면서 돈을 요구했다고 주장했고, 여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사역한다고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는 그런 은밀한 사생활이 없을 뿐더러 있다고 해도 이미 모두 버렸다.” 바울의 첫 변론은 1장 12절에 나옵니다.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나를 어떤 일로 비난해도 좋다. 나는 내 양심 앞에서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다”라는 말입니다.
이 싸움에 이기고 지는 것은 바로 양심에 달려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에 의하면 죄가 잉태되는 곳은 마음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할 무렵 거짓 교사들이 있었고, 바울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악랄한 시위를 벌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쓴 이유였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내 양심은 깨끗하다.”
바울은 여러 차례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후 목회서신에서도 자신의 양심이 깨끗하다고 언급합니다. 바로 죄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겁니다. 바울은 죄를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죄에서 돌아서는 중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바울은 복음의 영광을 자신의 깨끗한 삶으로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복음의 영광을 확인하고, 그 복음을 전하는 놀라운 특권의 자비를 인정했는데 어떻게 위선자처럼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복음의 영광을 이해하고, 복음을 전하는 특권이 자비로 주어졌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바울이 마음을 다해 진리로 선언한 거룩과 깨끗함에 이르고자 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거룩과 깨끗함을 사도행전 23장과 24장에서 두 번 증언합니다. “나는 양심에 거리낌이 없노라. 나는 양심에 따라 사노라.” 우리가 복음의 영광을 정말로 믿게 되면, 우리의 삶이 깨끗해지기를 원하게 됩니다. 귀히 쓰이는 그릇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주인의 쓰임에 합당하게 됩니다.
네번째 요점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복음의 영광을 이해하면 성경을 정확하게 전하고자 헌신하게 됩니다. 성경을 정확하게 선포하려 한다는 것이죠. 제가 자칭 기독교 방송이라고 하는 방송을 볼 때 제 아내가 이렇게 묻곤 합니다. “왜 또 그걸 보고 있어요?” 그러면 대충 넘어가곤 하는데요,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본문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화가 납니다. 제 거룩한 분노가 점점 커지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런 방송에 재정을 후원하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 방송에 시편의 저주가 부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 궁금합니다. 아시겠지만 성경을 혼잡하게 하는 사람들이 다른 어떤 것보다 저를 더 아프게 합니다. 성경이 제 삶이기 때문이고, 성경이 생명이자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아무렇게나 대할 수 없습니다.
2장 17절로 가보겠습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이 왜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고대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중에는 사기꾼, 허풍쟁이, 협잡꾼이 많았습니다. 포도주에 물을 섞었습니다. 비누에는 불순물이 가득했습니다. 금이 간 도자기에 왁스를 발라서 팔았습니다. 불이 닿으면 금방 녹아버렸죠. 정직하지 못했던 겁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17절에서 혼잡하게 한다는 헬라어는 ‘카펠류오’ 인데, ‘카펠로스’가 어원입니다. 이 ‘카펠로스’가 바로 시장 상인을 가리키는 말인데, 주로 사기꾼이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4장 2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속임으로 행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쓰인 단어 ‘파눌기아’는 ‘일하게 하는 에너지’를 의미하는 ‘우르기아’와 ‘속이기 위해 어떤 일이든 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판’의 합성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한다는 것은 함부로 바꾼다는 뜻입니다. 특히 포도주를 희석할 때 사용하는 단어로, 진리를 손상시킨다는 의미입니다.
만일 우리가 복음의 영광을 믿는다면 복음을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 혼잡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TV에 나와서 복음을 뒤틀고 왜곡하고는, 아프고 늙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돈이나 갈취하는 사람들, 로또 당첨과 같은 기적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복음의 영광을 이해하지 못한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아시겠습니까? 진리 그 자체에 증명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진리에는 증명하는 능력이 있어서, 진리를 거절하더라도 그 거절한 사람의 양심이 울리게 됩니다. 그 사람은 양심과 싸우게 됩니다.
몇 년 전에 저는 래리 킹과 자주 만났습니다. 저는 정말로 래리를 좋아했습니다. 그를 아꼈고,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개인적인 대화도 많이 나눴습니다. 그리고 래리에게 진리를 전했습니다.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더라구요. 진리는 진리를 거부하는 이에게도 권면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TV 속의 저 위선자들이 사기꾼이라는 사실은 교인들보다 믿지 않는 세상이 더 잘 알 것 같습니다. 복음의 영광을 이해하면 진리를 함부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깨끗한 삶을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 직분이 자비로 주어졌으며 엄청난 특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새 언약 복음이 얼마나 위대한지 깨닫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복음의 내용을 조금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그대로 전하면 효과가 별로 없기 때문에 좀 다른 방식으로 바꾸는 게 좋겠습니다.” 정말 그런가요? 다섯번째 요점이 바로 이겁니다. 우리가 정말로 복음의 영광을 이해하게 된다면,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알게 됩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씨를 뿌리는 자에 대해서 뭐라고 하나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왼손을 사용했는지 오른손을 사용했는지, 씨를 높게 뿌렸는지, 낮게 뿌렸는지, 돌려서 뿌렸는지 아무것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씨를 담고 있는 주머니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나요?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씨를 뿌리는 방법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나요? 없습니다. 땅에 대해서만 말합니다. 심지어 씨앗 자체에 대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 씨앗이 진리이자 복음인데도 말이죠. 씨를 뿌리는 기법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땅의 상태에 대해서만 말합니다. 땅을 좋은 땅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저는 마가복음에 있는 자라나는 씨 비유를 특히 좋아합니다. 예수님은 농부가 씨앗을 뿌리고 잠을 자러 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농부는 씨앗이 어떻게 해서 자라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과물이 없잖아요.” 정말로 여러분이 결과를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군가 말하기를 “복음을 대하는 소비자 저항을 극복해야만 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될 것 같습니까? 소비자 저항이라고 일컫는 복음을 거부하는 현상은 사람들이 부패했다는 증거입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현상은 죄인이 자신에게 맡겨진 것을 할 수도 없고 원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정말 맞는 말입니다. 바울의 설명은 정말 말이 됩니다. 사람들의 생각대로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바울 선생님, 실망스럽네요. 보십시오. 그렇게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시지만 선생님이 세운 교회는 작습니다. 게다가 문제로 가득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선생님을 거부합니다. 지도자들도 대중들도 모두 거부합니다. 선생님을 죽이려 합니다. 유대인들은 선생님을 뒤쫓고 있습니다. 실패만 거듭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바울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여기에서 한 부류의 사람들, 즉 망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이는 인류 전체의 기본 위치이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4절입니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는 기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효과적인 전도를 위해 실용적인 방법들을 생각해 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복음의 메시지를 소비자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서 소비자의 저항을 극복해 보려고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성경의 다른 부분을 다룰 때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노예>라는 책을 썼습니다. 혹시 읽어보신 분 계신가요? 노예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복음을 판매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한 유대인이 자기 민족 지도자와 대중들에게 배척을 당했습니다. 로마 군인은 그를 평범한 범죄 혐의로 사형에 처했습니다. 그런 그가 죽음에서 살아났습니다. 그는 살아계신 참된 하나님이자 구세주였습니다. 이제 그분이 여러분을 자신의 노예로 삼고자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다른 모든 주인들을 거절해야 하고, 여러분의 죄를 고백해야 하며, 그분만이 여러분을 구원해주실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이 분은 누구입니까? 십자가에 못박힌 유대인? 이것이 바로 바울이 이방 세계에 선포하고자 했던 내용입니다. 여러분이 그분을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분을 주인으로 고백하고, 그분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참으로 팔기 어려운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방 세계에서 소비자 저항을 극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구약의 배경이 전혀 없는 이방인에게, 십자가에 달린 유대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그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으라고 하니 말이죠. 오직 그분만이 구원자요,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요, 구원의 소망이라고 말하니 말입니다. 더군다나 그분의 노예가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전혀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십자가가 어리석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겠습니다.
결과는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직분의 기쁨입니다. 저는 씨를 뿌릴 뿐입니다. 자라게 할 책임은 저에게 없습니다. 저는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을 주십니다. 저는 5절 말씀이 참 좋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 방법을 통해서 우리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이렇게 반문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그런 메시지를 전해서 어떤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단 말입니까?” 6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정말이지 심오한 구절이지 않습니까? 바울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창조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대로 빛이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모델입니다. 하나님은 어두운 죄인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십니다.
이것이 이 복음을 전하는 직분을 감당할 때 경험하는 감격입니다. 결과에만 모든 것을 집중한다면, 여러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또 자신만의 기법을 사용해서 자신만의 스타일로 설교하게 될 겁니다. 또 옷차림과 특정한 동작, 음악, 문화 등에 집착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복음의 영광을 이해하게 되면 ‘나’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까지 무슨 내용을 다뤘습니까? 복습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영광을 이해하면 새 언약의 우월성을 이해하게 됩니다. 또 직분이 자비로 주어졌다는 것과 깨끗한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 성경을 정확하게 선포해야 한다는 것, 성령의 열매는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 우리 개인의 자아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저는 지난 몇 년간 7절을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에게 보배가 있다고 말입니다. 어떤 보배입니까? 질그릇에 담긴 복음이라는 보배입니다. 질그릇은 진흙으로 만든 토기를 말합니다. 이 말씀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진흙으로 만든 토기. 집에서 진흙으로 만든 토기는 어디에 사용하시나요? 그 안에 흙을 담아서 식물을 키울 때 사용합니다. 고대에 진흙으로 만든 토기는 잘 깨졌습니다. 모양이 거칠었습니다. 편하게 사용하는 용기였습니다. 진흙 토기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은 아마도 디모데후서 2장 20절일 것입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금 그릇이나 은 그릇은 언제 사용하나요? 음식을 먹을 때 사용합니다.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금 그릇과 은 그릇에는 가족들이 먹을 음식을 담습니다. 나무 그릇이나 질그릇, 진흙 그릇에는 아무거나 담죠. 쓰레기나 음식물 찌꺼기 같은 것 말입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루터는 쓰레기통이라고 불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다시 7절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는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의 질그릇, 진흙 그릇에 불과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도 바울은 이런 식으로 말하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매우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자기가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성직자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고린도전서 4장 13절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이 말은 냄비 바닥에 들러붙은 찌꺼기를 가리킵니다. 식고 굳어서 긁어내야 하는 그런 것이죠. 바울은 어떤 면에서 우리가 찌꺼기라고 말합니다. 냄비 바닥에 남은 음식물 찌꺼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복음의 영광에 대해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복음 자체와 경쟁해서 자기 자신을 높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높이는 일은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시간 관계상 조금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고난의 유익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의 영광을 알게 되면 고난이 유익하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더 유익한 사람이 되려면 더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합니다.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고난을 겪기 전에는 직분과 능력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8절부터 12절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절도 동일하게 말합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12절입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여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사망이 역사하면 너희 안에서 생명이 역사한다.” 더 많은 희생을 치르고 더 많은 고난을 겪을수록 더 강해진다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2장을 그냥 지나치면 안 되겠습니다. 12장 7절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바울은 위대한 계시를 받았습니다. 알다시피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고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만났습니다. 바울은 이 일들에 대해 매우 자랑할 법 했습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높아지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바울은 천국에 다녀온 것에 대해서 잠깐 말했습니다. 그곳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경험을 자랑해서 자기를 높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만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여기에서 “가시”라는 단어는 창을 의미합니다. 말 그대로 자만하는 육체를 뚫고 들어간 창입니다. 이 창은 사탄의 사자로 묘사됩니다. 사탄의 사자는 무엇입니까? 바로 마귀입니다. 이 마귀가 바울을 직접 공격했을까요? 고린도 교회를 맹렬히 공격하던 거짓 교사들이 마귀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명이 아마도 가장 적절할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아끼던 교회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교회에 대한 사랑 때문에 바울은 자기 마음에 말뚝이 박힌 겁니다. 고린도 교회는 마귀에 이끌린 거짓 교사들로 인해서 피해를 입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바울을 심히 괴롭혔습니다. 주님은 바울이 자만하지 않도록 이 일을 허락하셨던 겁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자만하지 않도록 문제가 생겨나게 하실 것입니다. 심지어 마귀를 사용해서라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우리가 자신을 더 높일수록, 주님께서는 우리를 더 낮추실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영광을 알게 된다면 고난의 유익도 알게 됩니다. 고난은 우리를 더 귀히 쓰이는 그릇이 되게 합니다. 우리의 약한 데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여지기 때문입니다.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우리가 스스로를 높이면 높일수록 더욱 쓸모가 없어질 뿐입니다.
두 가지만 더 생각해보고 마무리하겠습니다. 복음의 영광을 알게 된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딱 두 가지만 더 보겠습니다. 먼저 확신의 중요성입니다. 복음의 영광을 안다는 것은 확신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구절을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3절입니다.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시편 116편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제게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 그냥 물러서지 않으시겠다는 거죠?” 물론입니다.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누군가가 저를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존 맥아더 목사님은 사석에서는 꽤 다정한 분이십니다.” 저도 무슨 말인지 압니다. 저는 사람들과 무조건 싸우려는 게 아닙니다. 그저 진리를 선포할 뿐입니다. 진리가 선포되는 곳에는 언제나 대적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확신이 필요합니다. 또한 깨끗하게, 정직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설교를 하면서 그 내용이 듣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믿기는 하지만 말하지는 않을게요. 사람들이 불쾌해하기 때문이에요.”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립니다. 진리를 알고 있다면 선포해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저는 믿고 있기에 믿는 바를 선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들으시는 제 말은 모두 제가 믿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또 이렇게 물어봅니다. “왜 그렇게 모든 것에 대해서 열정적이십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고 확신을 갖게 되면 너무 신이 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믿고 있는 바를 선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성을 가진 남성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남성답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남성성이란 확신을 가지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자, 오늘 저녁에 말씀드린 내용을 이제 정리해 보겠습니다. 앞서 간략히 정리한 것처럼, 우리가 바울과 같이 새 언약의 영광을 이해하게 되면 삶에 커다란 변화가 생깁니다. 우리는 새 언약에 있는 영광에 감격하며 자격 없는 우리에게 자비로 주어진 직분의 특권을 이해하게 됩니다. 또 이 영광스러운 복음이 선포되는 일에 방해가 되고 싶지 않기에 정결한 마음으로 헌신하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혼잡하게 하지 말아야 할 책임이 주어집니다. 우리 사역의 결과는 오직 복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근본적인 것들이죠. 또한 우리 자신을 질그릇으로 여기게 됩니다. 고난의 유익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약함 가운데 하나님의 강하심이 드러나게 하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복음에는 확신을 가질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믿는 만큼 정결하게 살아가게 되고, 믿는 바를 선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복음의 영광을 이해하게 되면 현재의 고난보다 미래의 보상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13절부터 1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13절입니다.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14절입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5절입니다.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천국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겁니다. 16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1절에서도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죠. 다시 이어서 16절을 읽겠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저는 이생에서 명성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공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의 관심은 오직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에 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미래에 주실 보상에 있습니다. 저는 잠시 받는 가벼운 환난에 신경쓰지 않습니다. 사실 그렇게 많은 환난을 겪은 것도 아닙니다. 저는 보이는 것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제 삶을 세상적인 것들로 설명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것으로만 설명하기를 원합니다. 바울이 복음의 영광을 이해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내일 오전에는 죄인과 하나님 모두를 만족시키는 복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무엇이 이 새 언약을 영광스럽게 만들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에게 성경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경에 진리를 담아 주셔서 수십 수백 번을 읽어도 살아있는 말씀으로 다가오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생명의 말씀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분명하고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성경은 우리 지성에 진리를 채워주고, 우리 마음에 열망과 열정을 불어넣으며, 순종의 발걸음을 내딛게 합니다. 말씀을 살피며 함께하는 동안 하나님 홀로 모든 영광과 존귀를 받아 주옵소서.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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